상고사건은 제1‧2심 재판을 거친 최종심의 사건을 말한다. 항소심에서 승소한 당사자는 상대방의 상고에 의하여 부득이 피상고인(被上告人)으로서 마지막 관문을 지키려는 정도이지만, 패소한 쪽은 상고이유서라는 병기를 가지고 죽기 살기로 덤비는 채비를 하게 된다.
야구로 말하자면 최종 인닝에 들어가 이기고 있는 쪽은 마지막으로 마무리투수를 투입하여 방어할 것이고, 진 쪽은 결사적인 공격에 나서서 스코어를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진 쪽은 초조해 하면서 마지막 한방을 기대할 것이고, 이긴 쪽은 설마하면서도 안타를 허용하면 어쩌나 걱정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고심 사건에 대하여 당사자가 쏟는 관심은 대단하다. 대법원은 최종심인지라 더 갈 곳이라고는 없는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이고 그 승패는 운명을 좌우한다. 작은 사건은 작은 사건대로 큰 사건은 큰 사건대로.
상고인(上告人)의 대리를 맡으면 법정기간 내에 상고이유서, 때로는 보충상고이유서를 작성하여 제출함으로써 일단 임무는 다한 것이 된다. 그 뒤로는 판결선고의 통지만 기다리는 것이다. 하급심사건을 수임(受任)하게 되면 법정에 여러 번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준비서면을 써야지, 증거자료를 준비해야지, 증인신문사항을 만들어야지, 수시로 당사자를 만나야지, 법정에서 차례를 기다려야지, 보통 중노동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상고사건은 그렇게 편하고 점잖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고인의 경우 대법원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민사사건의 경우 파기율(破棄率)은 7%에서 8%, 형사사건이 경우에는 5% 정도밖에 안 된다. 야구시합에서는 마지막 단계에서 더러 뒤집어 희비가 교차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야구는 9회부터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흥행을 위하여 만들어 낸 말이지 스포츠라고 해서 그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상고사건이 성공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하급심판결에 그만큼 오류가 없고 결론이 잘난 것이라는 회답이 되기도 한다. 이런 각도로 보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꾸로 파기율이 많다고 하면 그만큼 재판에 대한 불신과 심급제도의 회의가 수반되어 사법(司法)이 근간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한편, 피상고인의 처지에서는 별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하여 피상고인 측을 맡으면 부담이 적어서 마음이 편하다. 가령 파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답변서를 잘못 써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심판결이 원래 그렇게 되어 있었고, 상고이유로서 그 흠을 지적했기 때문에 파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피상고인의 대리인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런 변명이 성립하므로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상고대리인이 받는 보수의 반, 아니 그보다 더 적게 받아도 피상고인 측의 대리를 맡는 게 좋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피상고인 대리인이라는 그런 물 좋은 사건은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게 잘 찾아오지 않는다. 대개는 풀기 어려운 작업을 맡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피상고인 측 대리인이 되어 답변서를 내고 기다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사자로부터 어찌나 시달렸던지 생각키도 싫은 경험을 한 일이 있다.
상대방이 추가로 대리인을 선임하여 상고이유서를 거듭 제출했는데 이미 낸 것과 별로 다른 내용이 없어 무시하고 있었더니, 의뢰인(依賴人)인 여인이 찾아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서 추가답변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고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이 여인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사건이 어찌 돌아가느냐, 그냥 기다리라지만 신경쇠약 증세가 악화되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저쪽에서는 대법원에서 이긴다고 큰 소리 치고 있다. 어떻게 좀 빨리 판결이 되도록 할 수 없겠느냐, 재촉 반, 불만 반, 한참 혼자 이야기를 하고는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 방도가 없다는 한 마디 냉담한 대답을 듣고는 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 전화를 귀에 대로 똑같은 하소연을 듣는 것이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러나 우리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상대방이 선량한 품종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걱정되었고, 어떤 사정으로 신속한 판결을 기다리게 되어 있었는 데다가, 대법관 출신을 대리인으로 세우면 빨리 해결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었으니 좀 도가 지나쳤지만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법률상 파기사유(破棄事由)도 성립되지 않는 것 같은 그 사건은 왜 그리도 판결이 늦는지, 날이 갈수록 사건을 수임한 것 자체가 후회되었다. 나중에는 파기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상고인 측의 대리인인 경우에는 당사자로부터 판결의 지연을 우려하는 말을 듣지만, 판결이 늦는 것은 파기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그렇게 심한 재촉을 받는 일은 없다.
사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뒤 바로 선고기일(宣告期日)이 지정된다는 것은 십중팔구 상고기각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사건이 어찌된 노릇인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소식이 없으니 그러면 상고기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이런 경우를 상기하면서는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길꼬 하는 걱정을 하던 어느 날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 소가(訴價)도 크지 않고, 보수도 얼마 받지 아니한데다가, 내용도 크게 복잡하지 않은 사건인데 끝까지 호된 시련을 겪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상고기각의 판결이 나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수십 차례 전화로 다그치던 여인은 선고 당일 “이제 어떻게 됩니까. 더 신경 쓸 일은 없겠지요.” 질문인지 인사인지 마지막 전화를 했다.
의뢰인이 다른 변호사의 소개로 찾아오는 상고사건은 대개 수임하기가 편하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가 까다롭지 않고, 예의 바른 편이며, 수임료에 대하여서도 시원스러운데다가, 패소한 이유도 수긍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가능성이 좀 보이는 사건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찾아왔는지 물어도 확실한 대답이 없는 사건은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부동산사건에 대하여 상고를 해 놓고 상고이유서를 써 달라고 청한 부부의 경우가 그랬는데 누구의 소개가 있었느냐고 물어도 어물어물하기만 했다. 사실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며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경우도 많다. 대충 사건 내용을 듣고 판결을 읽어보니 다툴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여 조금만 더 검토해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기록을 보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항소심의 변론 도중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담당변호사가 사임계(辭任屆)를 제출하고 당사자본인이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심리가 종결된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 대리인은 준비서면도 열심히 써서 제출한데다가 증인신문도 하여 성실히 관여하고 있었다. 마침 그 변호사는 내가 잘 아는 훌륭한 분이었으므로 왜 사임을 했는지부터 먼저 확인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어 상고심을 맡아 달라고 왔는데 그 사건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아, 그 사건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항소심에서 우리 쪽이 졌군요”하고 판결이 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리인을 사임한 것은 한마디로 의뢰인이 너무 까다로워 피곤해서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의뢰인이야 자기 사건의 승패(勝敗)에 집착하다보면 그런 사람 저런 사람 더러 겪는 것 아니냐, 도대체 당신같이 무던한 사람이 어째서 사임계를 던지게 되었느냐고 호기심 삼아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자초지종 경위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의뢰인인 남자가 어찌나 지독한 사람이던지 변론기일을 며칠 앞두고는 매일같이 찾아오질 않나, 와서는 같은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하질 않나, 준비서면의 내용을 낱낱이 손대는가 하면, 증인신문사항의 글자 하나하나 따지고 고치고 하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어느 날 한 번 더 그런 투로 간섭하면 소송대리인을 그만두겠다고 통고를 했다 한다.
그런 뒤 얼마동안 잠잠하더니 그 버릇은 고치지 못하는지 또 찾아와서는 준비서면을 한 번 더 제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증인을 재신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식으로 되풀이하더라는 것이다. 두말하지 않고 사임계를 제출한 다음 바로 수임료 전액을 의뢰인의 구좌로 송금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반환한 수임료를 그대로 돌려받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느냐고 했더니, 물론 그랬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의뢰인을 불러 기록을 돌려주면서 사정이 있어 수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아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