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상고사건의 수임을 끝내고 상고인의 대리인이 되어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경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본다. 이렇게 해서 상고이유서를 법정기간 내에 대법원에 제출하기만 하면 일단 임무완수는 된 셈이고, 그 다음은 사무실에서 결과만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상고사건이 편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서 의뢰인으로부터 소송수행을 부탁받는 것은 위임계약(委任契約)이므로, 사건의 승패(勝敗)에 관계없이 사무처리에 대한 보수를 받게 된다. 의사가 환자의 치료를 하는 것도 「질병의 치료와 같은 결과를 반드시 달성해야 할 결과 채무가 아니라 환자의 치유를 위하여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가지고 현재의 의학 수준에 비추어 필요하고 적절한 진료조치를 다해야 할 채무, 즉, 수단채무라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위와 같은 주의의무를 다하였는데도 그 진료 결과 질병이 치료되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치료비는 청구할 수 있는 것」(대법원 1993. 7. 27. 선고 92다15031 판결)과 같다.
그래서 상고사건의 임무완수라는 말을 한 것이다. 서면 하나 내놓고 임무는 끝났다는, 패소의 결과가 나와도 무정하지만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상고기각의 패소판결을 받았을 때 대리인이 받는 충격(衝擊)과 시련(試鍊)이다. 하급심판결은 상소(上訴)하여 한 번 더 싸워 본다는 기대와 핑계가 성립되지만, 상고심의 마지막 판결은 그런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무리한 쟁송으로 패소(敗訴)가 어느 정도 예견된 경우는 몰라도, 정말 억울해서 구제되어야 한다고 작심하고 있었던 사건일 때 당사자의 아픈 마음은 형언할 수 없다.
마지막 기회에서 무너지고 마는 경쟁자의 마음은 실로 참담한 것이다. 여기에 소송대리인의 낙담과 실의가 동반된다. 변호사에게는 수임사건의 하나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사건을 맡긴 의뢰인의 울분과 통한에 비견할 수 없을 것이지만, 사건에 따라서는 거기에 쏟아 부은 열정이 아까워서도 의뢰인에 못지않은 분노를 느낀다.
또 한 번 상고사건의 대리인과 야구경기를 생각해 본다. 참으로 미묘한 사건의 경우다. 패배를 눈앞에 둔 팀의 최종찬스에서 타자가 등장한다. 1대 2의 스코어에서 9회 말, 투 아웃, 주자 만루,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타석에 나간 타자, 안타 한 방 또는 볼 넷이면 역전인데 타자는 투수의 공을 그냥 보내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여 아웃, 게임 셋. 상고기각으로 승부가 결정 난 이 게임에서의 타자는 상고이유서를 쓴 담당변호사.
땅을 치는 감독, 고개를 숙인 타자, 상상해 보라,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인가를. 얼마나 비통한 순간인가를. 또한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보라. 안타를 쳐서 게임이 역전되는 순간을, 담당변호사가 영웅으로 대우받는 장면을, 스트라이크를 못 던졌거나 한 방을 내 주어 주저앉은 상대방 투수의 모습을.
세상의 이치가 이런 것이지만 사건 당사자와 가족, 그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엄청난 분쟁의 결말을,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투쟁을, 한갓 스포츠게임에 비교하다니. 그렇다, 설마 하늘과 땅 차이의 거리를 모르겠는가. 그래도 그냥 넘어가 주기 바란다. 중요한 문제는 앞의 찬스를 놓친 경기에서 가령, 주심의 스트라이크 판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때다. 사람의 하는 일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최종 찬스에서 스코어가 0 대 3 정도로 지고 있는 시합이면 아무리 좋은 타자가 나와도 번복하기 힘들다. 기록을 검토해 보아서 상고의 실익이 반반이면 말할 것도 없고, 60% 정도의 성공률이 예상되어도 상고기각을 면키 어렵다. 상고이유서를 써 본 후의 느낌이 적어도 70%정도가 되어야 기대할만 하고, 80%가 넘으면 파기의 확신이 선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그런 자신이 생기는 경우란 원심판결이 법령의 해석‧적용을 잘 못했거나 판례를 거역한 사례에서 생긴다. 처분문서(處分文書)의 증거력을 배척했거나 크게 경험칙(經驗則)을 어겨 사실인정을 한 경우도 그렇다. 나는 이런 흠을 지적하여 예상한 대로의 파기판결을 받아 맛좋게 성공한 경험이 더러 있다.
그런데 상고이유서를 써 놓고 변호사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파기를 확신하고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상고이유 자체가 한쪽 당사자에게 유리하기만 한 일방적인 주장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패소한 후 상고심판결에 대하여 대리인조차 심하게 불평을 하는 경우에도 자세히 들어보면 상고심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았다.
나는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전에 의뢰인에게 이를 보여주면서 으레 쓰여 있는 내용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상고심은 법률심(法律審)이기 때문에 항소심판결을 여간해서 건드리지 않는다고 설명해 준다. 그래도 속으로는 한없이 상고이유서에 의지하고 싶은 것은 본인이나 대리인이나 같다.
자신만만하게 생각한 사건도 뜻밖에 패소판결이 내려지는 일은 빈번하다. 상고사건에 대하여 경험이 많은 변호사는 절대로 자만(自慢)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남의 분쟁을 맡아 대리전쟁을 치르는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판결선고기일의 통지가 온 날로부터 시련이 시작된다. 의뢰인인 당사자는 운명의 날을 기다리면서 초조해진다. 판결 선고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의 도는 더해간다. 변호사는 이런 순간에 익숙해 있는 듯 하지만 당사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걱정으로 차게 된다.
김일두(金一斗) 변호사의 수필 「판결전야」(법률신문 1999. 3. 18.)는 판결선고를 앞둔 의뢰당사자와 수임변호사의 초조한 심정을 국가고시 합격자 발표 전야의 응시자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고 기막히게 비유하고 있다. 변호사들은 판결전야(判決前夜)라는 제목자체에서 공포와 기대감이 암시되고 있는 것임을 잘 경험하고 있다.
드디어 대법원판결의 선고 당일, 오후 1시 반. 선고법정에 나가 안절부절 재판장의 입을 주시하는 의뢰인의 기분을 상상해 본다. 변호사는 그 시간에 사무실을 비우고 사우나에 간다는 말도 있다. 그게 정신건강상 현명한 일인 것 같지만 위기를 잠시 모면하는 효과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간 패소판결이 있은 뒤 의뢰인을 면대하는 일, 그것은 변호사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상고기각의 주문을 들은 의뢰인으로부터 전화나 방문을 받을 때에는 괴롭지만 한 번은 넘겨야 할 고비라 생각하고 불평을 들어주어야 한다. 여자 의뢰인인 경우 한숨을 쉬면서 지루하게 불만을 이어갈 때에는 받은 보수 다 내주고 싶은 생각부터 들기도 한다.
관심을 쏟고 있는 중요사건에 대하여 의외의 패전소식이 날아들면 온 몸에서 급격히 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된다. 슬슬 좌절감, 패배감에 젖어 만사 자신을 잃는다. 당사자의 실망과 분노의 얼굴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