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패소확정(敗訴確定)의 순간에 당하는 실망과 분노를 당사자의 몫까지 이중으로 덮어쓰는 꼴이 된다. 패소한 당사자가 변호사에게 불만을 토로한다든지, 판사를 나무라면서 간접적으로 변호사의 역할과 능력에 대하여 섭섭함을 나타내는 것은 흔한 일이며 그런 의뢰인을 비난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좋은 의뢰인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패소당하고도 항의 아닌 인사를 받은 일이 적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용을 들여 싸운 송사(訟事)에서 지고 만다는 것은 분통이 터질 노릇이고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는 일이다. 그런 와중에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인사말을 건네는 일이 쉽겠는가. 일을 그르쳐 실의에 빠진 대리인에게 위안의 말을 던질 정도의 의뢰인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고, 그 하나만으로 그 사람됨의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오래오래 기억하며 존경한다.
거꾸로 승소판결을 얻게 되면 그 순간 모든 불안이 말끔히 사라지고 하늘을 날 듯 의기양양해진다. 그리고는 당연히 이길 사건이 이긴 것이라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여유까지 생긴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든지 상고이유서가 제출되자마자 선고기일이 잡히고 예상한 대로 상고 기각의 판결이 선고되는 경우가 있다. 대법원의 사건은 참으로 예측할 수가 없는 것, 어떤 판결이 내릴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도대체 언제쯤 판결이 있을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으니 당사자는 물론 변호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1년, 2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앞의 사건처럼 한두 달 만에 불쑥 선고기일통지가 송달되어 오는 것도 있다. 보나마나 상고는 기각되는 것. 제출마감시간을 지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변호사에게는 매우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뢰인도 그 노력을 이해하지만 그에게는 결과가 중요하다. 결국 변호사가 한 게 뭐 있느냐는 투정을 듣게 되고 변호사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가장 심하게 변호사의 자존심을 구기게 하는 것이 있다.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 재판이다. 대법원이 상고이유를 보고 그 내용이 민사소송법상의 상고이유에 실질적으로 해당하는가에 대한 판단에서, 이를 부정하는 경우 판결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하고 선고기일의 지정 없이 바로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하는 제도이다. 상고심의 무용한 업무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마련된 방책으로서 상고이유의 당부에 대하여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종전의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에서의 상고허가제(上告許可制)와는 달리 심리불속행제도 아래서는 모든 패소당사자가 아무런 제약 없이 상고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익한 상고」를 걸러내는 장치에 걸려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차이는 꼴인 것은 똑같다. 그러니 상고이유서를 쓴 변호사로서 선고기일의 통지도 없이 어느 날 난데없이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만 있는 심리불속행의 판결이 날아온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제도는 대법원의 과중한 부담을 덜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변호사의 대리가 있다고 하여 그 적용을 배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지만, 상고사건의 소송대리인끼리라도 되도록 예의를 지켰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한번은 나의 상고이유서를 받아 본 상대방 변호사의 답변서가 왔는데, 내용인즉 상고이유는 상고심절차에관한특례법에 의하여 심리불속행사유에 해당하는 것이니 상고를 기각해 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매우 불쾌했다. 그런데 그 사건은 나중에 파기 환송되었다. 마치 분풀이라도 된 것처럼 이중으로 통쾌했다.
물론 심리불속행이라는 즉결처분대상 감의 사건이라도 보이는 상고이유가 더러 있다. 나도 그런 답변서를 쓴 일이 있다. 그러나 소송대리인인 변호사가 쓴 상고이유에 대해서는 가령 심리불속행사유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런 표현은 삼갔다. 이기면 그만인데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라고 주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은 대부분 상고기각이지만 가뭄에 콩 나듯 파기를 선언한다. 어느 변호사는 의뢰인으로 하여금 제발 대법원의 법정에 나가 직접 선고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파기판결을 받기가 어려운지를 현장에서 확인하라는 취지이다. 그렇게 해서 불만의 분출을 삭이게 한다는 이야기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인용(認容)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상고심이 법률심인 까닭에 사실인정(事實認定)과 같은 것은 제1‧2심의 전권(專權)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심판결이 인정한 어떤 사실관계에 대하여, 상대방이 제출한 증거를 채택하고 우리 측 증거를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난 것이며 이러한 처사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는 상고이유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공격은 거의 실패한다.
파기판결 가운데 특히 민사사건에서 사실 오인의 위법을 지적하여 환송(還送)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주심대법관의 사건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노력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실제 대법원의 합의(合議)에서 주심대법관의 역할이 막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인정의 오류를 지적하여 구성원 대법관들을 설득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원심판결을 유지해야겠다는 상고기각의 의견은 쉽지만, 거꾸로 파기를 해야 할 이유 설명은 만만치 않을 때가 많다. 사실인정의 흠을 이유로 파기를 하자면 자세한 사건내용과 관계증거를 일일이 비교설명하고 그 과정에 판결에 영향을 미친 채증법칙(採證法則)의 위반이 있다는데 대하여 관여 대법관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