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건의 처리에 관하여 그 결론의 정당성, 판결의 이유 설명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만 그 선고과정도 섣불리 다루어서는 안 된다. 재판의 공정성(公定性)에 관한 당사자의 불신은 패소한 쪽에서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 끈을 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다음에 이야기하는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처신은 당사자의 눈으로는 갓 끈을 맨 정도를 넘어 오해를 산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변호사와 공동으로 피상고인 측을 맡은 상고사건이었다. 상고사건에 대하여 경험이 많은 변호사도 이런 일은 별로 겪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개의 상고사건이지만 한쪽 당사자만 다를 뿐 사건내용은 똑같다. 광주고등법원에서 하나는 1999. 6. 11.에 다른 하나는 같은 해 9. 18.에 선고가 되었다. 우리 쪽 당사자가 모두 승소한 사건인데 상대방의 상고로 두 사건이 각각 다른 대법관 주심으로 배정되었다. 그런데 금 1억 원의 대여금사건에서 승소한 9. 17. 선고의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금 2천만 원의 공탁으로 강제집행정지결정(强制執行停止決定)을 내렸다. 상고기록이 접수되기 무섭게 상고이유서도 나오기 전에 말이다.
얼마 후 상고이유서가 송달되어 답변서를 쓰기 위하여 자세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상고이유는 어디까지나 사실인정을 헐뜯는 것이라 쉽사리 파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집행정지결정이 쉽게 나온 저의에 비추어 볼 때 뭔가 불안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실인정을 비난하는 상고이유가 먹혀들지 않는다고 해도 대법원에서 원심의 증거취사 판단과 반대되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작심할 때에는 어쩔 것인가,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대법원이 위와 같은 사건에서 일부 적은 금액의 공탁을 조건으로 단 시일에 강제집행정지결정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몇 년 전에 부산에서 올라온 상고사건을 맡아 상고이유서를 내고 강제집행정지를 신청한 일이 있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 그 신청에 대하여 답이 없었다. 경매는 진행되고 상대방은 무자력이고 그래서 우리 당사자는 초조해서 어쩌면 좋으냐 전화가 오고 했지만 난들 무슨 방도가 있어야지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하고 넘겼는데, 어느 날 신청을 기각한다는 결정이 날아왔다.
대법원에서 정지를 받기 참 어렵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거기에 대해서 본안(本案)의 상고도 가망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예측이 당연히 따랐다. 그런데 몇 달 후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파기 환송되었다. 그때는 이미 가집행선고에 의한 강제집행이 끝나 재산은 다 날린 때였다. 사건을 성공시키고 미안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당사자는 씁쓸한 표정이지만 “변호사님, 수고 많았습니다.”하는 인사는 빼 먹지 않았다.
이런 경험까지 있지만 대법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우리 당사자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사흘거리로 드나들면서 주심 대법관과 상대방 변호사의 예사롭지 않은 친근관계에 관한 소문도 들었다는 등 걱정이 태산이었다. 양 당사자의 사건을 둘러싼 자존심과 감정대립은 금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행정지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파기판결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면서도 우리 변호사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공감하면서 다시 한 번 파기 가능성을 검토해 보기도 했다.
형사사건에서도 사기죄로 고소한 우리 쪽 당사자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겠다, 사실관계를 인정하는데 있어 증거도 한 둘이 아니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파기할 만한 꼬투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상고심에서 사실오인으로 파기된 예가 얼마 있는가. 그러나 그건 아군 편에서 항상 유리한 방향으로 잣대를 대니까 그런 것이지 한두 번 경험했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1999년 12월 중순 어느 날 집행정지가 있은 사건에 대하여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 상고이유서가 제출된 지 한 달 반 만이다. 의외로 속결인 셈이다. 이걸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선고가 빨리 잡힌다는 것은 볼 것 없이 기각이 아닌가, 그러나 선고는 이듬해 1월 중순으로 연기된다. 왜 그럴까. 그때 가서 다시 선고기일은 추후로 지정된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두 사건을 함께 처리하기 위한 의도인 것 같긴 한데 무시무시한 선고기일의 통지를 자주 바꾸는 것 그 자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대법원으로서 그만큼 신중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또한 틀림없다. 하급심의 선고기일 변경에도 이해당사자는 별의별 억측을 다하면서 변호사에게 이유를 알아내 달라고 할 때도 있다. 하물며 변론을 열지 않는 상고심의 밀실재판에 있어서는 선고의 통지만이 유일한 정보일 터인데 얼마나 궁금해 하겠는가.
선고가 기약이 없어 다소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2000년 4월 어느 날 결국 선고기일이 잡혔다. 결과는 걱정한 대로 두 건 모두 파기 환송. 「원고의 주장사실을 인정한 원심의 조치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원심법원이 채택한 서증과 인증을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조리 배척한 다음, 「원심이 위와 같이 기록에 나타난 여러 사정들과 경험칙에 비추어 볼 때 믿기 어렵거나 증거로서 가치가 별로 없는 증거들만으로 원고가 주장하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원고의 청구를 일부 인용한 조치는 결국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서 채증법칙에 위반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오이한 위법을 저지른 것」이라고 판시했다. 주심대법관은 석 달 뒤에 임기만료로 퇴직했다.
맨 앞의 야구시합의 예에서 타자가 마지막 공에 대하여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고 쓸쓸히 물러난 장면을 이야기했다. 이 사건에서는 9회 말 2대 2 만루 상황의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에서 주심이 볼 판정을 하여 승부가 뒤집힌 셈이다.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그 판정은 주심의 전권으로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며, 투수가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가 틀림없다고 어필해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다만 스트라이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투수나 역전패한 팀으로서는 피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다는 것뿐이다.
사실인정의 오류를 가지고 원심판결을 파기하는 예를 높이 평가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위의 판결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판결주문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 대하여 공정성이 의심되면 재판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추락하고 마는 것을 걱정해 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