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회보 1998년의 마지막 호에 실린 위의 제목으로 쓴 글도 법관의 길과 관련되는 내용이므로 이를 보기로 한다. 그 무렵 대법원 공보관인 목영준(睦榮埈) 부장판사의 청에 의하여 쓴 것이다. 아래 내용에 나오지만 당시 법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고, 많은 법관이 이직을 고려하는 심각한 실정이었으므로 해를 넘기면서 판사들을 위로, 격려하는 한 말씀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문제가 된 법원 분위기에 대하여 잠시 운을 뗀 김용한(金容漢) 판사의 글이 2002. 5. 15.자 법원회보에 있었으므로 이 부분을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미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터라 연수원을 수료하고 1997. 2. 바로 판사로 임용되어 의정부지원에서 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그 유명한 1997년이 의정부지원이 그곳이다. 민사합의부 좌배석으로 판사의 첫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한겨울의 월요일 아침 조간신문과 함께 시작된 사건은 새로 부임한 지원장님을 제외한 30명의 판사 전원을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놓고 말았다. 지금도 정지화면처럼 각인된 장면 몇 개가 가슴에서 떠오른다. 한꺼번에 이삿짐을 싸느라 북새통이 되어 버린 청사, 부장님과 배석판사 2명의 이삿짐 꾸리는 일을 돕느라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던 김 양(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김 양은 우리를 배웅하며 끝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한 김 양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곤 하다가 다시 짐을 꾸리는 나, 다들 2년은 여기서 쓰려고 장만한 것들인데‥‥ 판사실을 향해 포탄이라도 쏘아 부을 듯이 포신처럼 긴 렌즈를 늘어뜨린 채 늘어선 취재 카메라의 행렬, 흡사 맹수가 먹이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 떠나 버린 오후에 남은 짐 몇 개를 들고 총총 걸음으로 청사 문을 나서던 나, 그렇게 초임의 1년은 막을 내렸다.⌟
나는 법원의 집안 식구들끼리 보는 내부간행물을 꼬박 꼬박 보내주는 데 대한 답례도 이 기회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몇 자 써보기로 했다.
판사들에게 1998년은 고달프게 보낸 한 해였다. 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국민전체의 허탈감, 좌절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유로 판사들이 기를 못 펴고 지낸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판사들 개개인을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고 당장 법원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보통 걱정되는 일이 아니지만, 사법부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로서 건 재판에 신뢰감이 떨어지고 끝내 불신이 팽배해진다고 가정해 보라. 사법부의 위상은 어떻게 되며, 나라의 장래는 어찌되겠는가.
판사들의 기를 죽게 한 사단은 이른바 의정부지원 판사비리사건에서다. 판사 수십 명이 관내 및 변호사로부터 명절 떡값, 사무실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하였다는 것이다. 언론은 때를 만난 듯 이제사 사법부의 구조적 비리의 실체가 드러났다고까지 했다. 어떤 신문은 ‘돈 판사’에 기소유예라니 라는 사설 제목을 달기도 했다. 마치 전국 어느 법원에도 판사와 변호사 사이에 그런 유형의 부정한 거래가 있는 것처럼 내비치었다. 사법부는 사회 여론의 기세가 워낙 강하여 그냥 덮어두어서 될 성질의 사건이 아님을 감지했다. 말썽이 있는 판사를 사직케 하고 그들 중 일부에 대하여는 강도의 징계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 직후 38명의 지원판사 전원이 교체되는 전례 없는 인사가 이루어졌다.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은 더 심하게 통제되기 시작했다. 판사와 변호사의 불순한 고리를 끊는 데 목적을 둔 이 조치는 전관예우를 막는다는 이유로 전관이 수임한 사건을 특별히 관리하는 제도와 더불어 법조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시책인 것이 틀림없지만 오죽했으면 그러기에 이르렀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 서글프기만 하다.
무인년(戊寅年)은 이런 일로 판사들의 사기가 위촉된 한 해였다. 판사들은 여러 이유를 대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법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자녀의 과외학비 부담 등 경제적인 어려움 아니면 승진 누락 등으로 인한 인사불만 기타 비슷한 이유로 그만두는 법관이 차츰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금년 8월까지 이직한 법관의 수가 130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근속연수 10년 이상 20년 미만의 중견이 40%를 차지한다는 것이니 놀랍기 이를 데 없다. 변호사업의 경기가 신통찮다고 아우성인데 법복을 벗는 숫자가 이렇게 느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앞의 이유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부터인가 직업 자체에 매력이 없어졌는가. 재판 업무의 처리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파졌는가. 변호사의 양산과 관련하여 장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는가. 혹은 작금의 침체된 분위기에서 훨훨 벗어나고 싶다는 감상적인 이유도 있었을까. 판사들이 법원을 떠나는 연유를 분석하여 무슨 해결책을 찾아내어야겠다.
판사와 변호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좋을까. 더불어 한 연못에 노는 부류이니 서로 가까울 수밖에 없다. 성어가 되고부터는 흰색, 노랑색, 붉은색으로 분류가 되지만 어느 때쯤 가서는 흰색이 붉은색으로, 노랑 것도 붉은 색으로 변하여 같은 무리 속에 합류하게 된다. 어쩌다 한 때 붉은색도 흰색으로 바뀔 때가 있다. 인간적으로도 서로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업무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학교동창이거나 시험동기이거나 같은 사무실을 쓴 일이 있거나 하는 관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의정부지원 판사가 변호사로부터 금품의 지원을 받은 것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판사는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아주 먼 사이가 되어야 하는 그런 관계임을 망각하고 있다.
법률조항은 투명할수록 좋다. 그 표현이 애매할 때 그 해석이 갈팡질팡해지기 때문이다. 법관직은 다른 어느 직책보다도 정의롭다는 인상을 필요로 한다. 불순물 같은 것이 묻을 수 있다는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소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판사도 인간이고 사회인이다.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고립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문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판사직은 정신적으로 몇 갑절 고달프다. 판사가 절친한 사이의 변호사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든가 향응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사실만으로도 비난해서는 가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떠한 식으로든지 오해를 살 염려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은 성립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 국민은 판사에게만은 그의 조그마한 흠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면에서나 부정비리가 판을 치고 있는 오늘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국민은 한없이 판사의 순결을 믿고 싶어 하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크면 그럴수록 분발을 충동하기 위해 부모의 채찍질이 필요할 때가 있다. 판사에 대한 국민의 질타는 사랑의 매와도 상통한다. 그러나 판사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서운하다. 국민들의 기대가 크면 그만치 사법부를 감싸주는 배려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고 탓하게 된다. 법원에 대하여 실정에 어울리지 않는 주문을 하기 일쑤고 성에 차지 않으면 흥분하고 모함하고 행패를 부리는 식이라고 불평한다. 판사의 업무량을 아는가. 요즘 어떤 단독판사는 500건 이상을 가지고 씨름한다고 한다. 심지어 일요일에도 직장에 나와 기록을 보는 형편이라고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변호사 없는 본인소송이 늘어나서 소장만 덜렁 내놓고 재판부더러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식의 억지가 많아 여간 골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힘든 일도 일반 국민의 신뢰와 애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지원 때문에 견딜 수 있었지만 요즘 같아서는 그런 버팀목조차 없어서인지 느는 업무량만치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다. 법원의 업무과중은 바로 사법 서비스의 질에 연결된다. 사건 당사자로서는 재판부의 피로에 젖은 듯한 표정만 보아도 불안감을 느낀다. 판사의 무거운 짐은 국민을 위해서도 덜어 주어야 한다.
태풍은 상당한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이제 판사들이 겪은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누가 위로해 주어서 치유될 일도 아니고, 편들어 줄 누가 등장해 주기를 기다릴 성질의 것도 아니다. 판사들 스스로 이를 악물고 당당히 나서야 한다. 사법부가 어쨌다고 몸을 사려야 하는가. 법관도 공무원이라고 해서 다른 공무원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지만 한마디 해보자. 이 나라에 그래도 법관만치 처신에 잡음이 없는 공무원이 있었던가. 법관만치 일에 파묻혀 산 공무원이 있었던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이 재판의 생리인데 어디 한 번 투정을 하던가, 변명이라도 늘어놓던가, 청백의 인물들이 가득해도 어디 그 일로 나선 일이 있던가.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판사들이 왜 그렇게 쉽게 사표를 쓰는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디 있건 요즘처럼 줄줄이 법원을 떠나는 현상은 매우 우려할 일이다. 우선 법관을 지망하는 사법연수원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걱정이 된다. 자기 직업에 대한 경외감, 애착감 같은 것이 그렇게 쉽게 방기(放棄)되는가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날에는 다른 분야도 비슷하였겠지만 법관도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분명한 것은 그래도 판사이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권위와 명예를 던지고 변호사 간판을 다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쩌다 세상이 변해서 이제는 부자가 아닌 것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사회분위기 탓도 있는지 법관직의 숙련공이 되어 한창 일할 시기에 변호사로 빠져나가는 수가 많아진 것이다. 지난날과는 달리 직장을 떠나는 방법조차 거칠어진 것 같다. 젊은 판사들은 해외연수의 혜택을 받을 때 다짐한 약속도 저버리고 연수비를 반납하면 사표를 수리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자기주장을 굽히지 아니한다고 한다. 부장판사나 되는 사람은 법관 정례인사의 어려움쯤은 알 터인데 인사가 마무리된 직후에도 사표를 던진다. 재판장의 지도만 바라고 있던 두 배석판사는 어디로 흩어져야 하는가.
판사들도 이제 좀 숨을 크게 쉬고 조급한 생각일랑 버려야 한다.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어쩌자고 새벽녘까지 일을 하는가. 당신 몸이 무쇠인 줄 아는가. 미제사건이 천 건이면 어떤가. 사건 당사자는 일에 쫓겨 내린 설익은 결론을 우려한다. 건강하고 맑은 정신에서 재판해주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좀 여유 있고 멋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잠시 기록에서 논을 떼고 옆의 동료판사에게 무슨 고뇌가 없는지 살펴보자. 선배는 후배를 도닥거려주자. 재치 넘치는 판결이 얼마나 많은가. 입이 벌어지도록 칭찬해 주자. 어느 하루 저녁은 같이 어울리자.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떠들어 보기도 하자.
판사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