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이고 사면권의 남용이다. 교과서를 보면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는 헌법내재적한계(憲法內在的限界)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사면권은 국가이익과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남용되거나 당리당략적(黨利黨略的)차원에서 행사할 수 없다는 것, 국가분립의 원리에 비추어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결과가 될 정도의 사면권 행사는 허용되지 아니하며, 사면권은 사법부의 권위를 훼손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기준과 원칙에 따라 적정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면권이 합리적으로 운영되기만 한다면, 사면권의 남용이란 말이 나오지 않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사면은 일률적인 법적정의(法的正義)보다 높은 차원에서 평가되고 합목적성(合目的性)이 추구되어야 한다. 때로는 정권의 유지를 위해 다소 억압적인 절차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받게 한 시국사범(時局事犯)이 있을 수 있고, 이들을 풀어줄 필요도 있다. 때로는 교통‧환경‧경제사범을 대사면하여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시키고 경제의 활성화, 재충전을 도모케 하는 것도 절실하다고 생각될 시기가 있다.
그동안 우리 대통령들은 어떻게 사면권을 행사해 왔다고 할 것인가. 불행히도 권력분립원칙(權力分立原則)에 대한 중대한 예외로서의 위와 같은 내재적 한계를 의식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징후가 많다. 대통령들은 법의 권위와 국민의 공감대를 외면하면서 무소불위로 권한을 발동하여 온 흔적이 있다. 마치 대통령이면 아무런 제약 없이 무조건 범법자를 풀어줄 수 있는 권능이라도 있는 것으로 착각한 듯이 말이다.
1970년대 유신통치(維新統治)시대의 대통령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대통령긴급조치위반이라는 굴레를 씌워 공판정에 내세웠다. 징역 10년이니 7년이니 하는 구형이 내려지고, 판사는 약간의 에누리를 한 형을 선고했다. 구형의 반 이상이 삭감되면 검사는 반드시 불복했다. 민주애국투사로 자부하는 피고인들은 형이 높을수록 의기양양했다. 최후진술의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은 판사를 비아냥대는가 하면 심한 때에는 욕설을 퍼붓고 고무신짝을 던지기까지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재판이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이 확정된 후 몇 달 만에 틀림없이 특별사면(特別赦免)으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판사의 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법조인의 시각에서 보아 그런지 사면권 행사도 얄밉게 했다. 1983. 3. 8.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위반,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등 이른바 부산 미문화원(美文化院)사건의 주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하는 상고기각의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단 일주일만인 3. 15. 그들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대법원판결을 보면 양형(量刑)에 관하여 「피고인 등에게는 도시 이 사건 범행을 뉘우치는 빛이 없다」는 등 극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도 지금에 와서 보면 참 눈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종심에서의 사형판결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1975. 4. 8.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위반 등 인혁당사건(人革黨事件)의 피고인 가운데 8명에 대하여 사형을 확정했고, 그들은 바로 다음날 모조리 집행되지 않았던가. 생명형은 같은데 너무도 대조적이라서 예를 들었다. 대통령으로서 사법부를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법의 체통을 지켜주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단 며칠만에 판결을 훼손해 버리는 조치를 단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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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진 김대중 당선자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매일경제. 1997. 12.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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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가 뭐래도 사면은 계속된다. 국민대화합(國民大和合), 얼마나 좋은 구실인가. 이번에는 김영삼(金永三) 정부의 임기가 다해가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된 직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과 이른바 12.12, 5.18, 관련자 그리고 비자금 사건 관련자 등이 사면‧복권되었다. 전직 대통령들은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1997. 4. 17.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는데,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 22. 결국 풀려나고 만 것이다.
위 두 사람 대통령과의 정경유착(政經癒着)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재벌총수 등도 그 전에 이미 특사 되었다. 넥타이를 매고 재판받던 재벌총수들에게 징역형의 실형이 선고되던 순간 저를 어쩌나 하고 놀랐던 것은, 추상같은 단죄에 몸을 움츠린 것은 역시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얼마 안가 사면‧복권되는 수순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꿈에서 깨어났다. 그렇지,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 어디 한두 번 겪은 일인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과 관련하여 하나 이상한 것은 대부분의 유력 신문들 사설(社說)에서 그 사면조치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후보들 중 특히 정치적 냄새가 덜한 강직한 법조인 출신의 후보조차 국민화합의 계기에서, 또는 결자해지의 측면에서라는 이유를 달고 사면을 찬성했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은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가보다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법조인들은 물론 우리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의 견해는 영 딴판이었다. 권력형(權力型) 범죄자들을 이렇게 쉽게 사면한다면 한국의 법치주의는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나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그렇다. 권력자의 제멋대로식 습성은 고쳐져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사면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남용되어서도 안 된다. 사면권의 남용이라는 의혹과 비난은 그 자체 법치주의의 붕괴와 연결된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그 대상과 정도 그리고 시기를 적절히 판단해서 행사하여야 한다. 때로는 사법부의 의견을 경청하는 아량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앞으로의 대통령은 지난날과 같은 고유권한적(固有權限的)‧자의적(恣意的)인 사면권 행사라는 의혹에서 벗어나도록 제발 좀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