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된 이상 채무자에게 고율의 지연이자를 배상케 하는 등 제재를 가할 이유가 없다. 이는 입법목적에도 합치되는 해석일 것이다. 특히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소송에 있어서는 채무자는 거액의 배상여부라는 문제를 불의에 당면하므로, 소송에서 그 배상의무의 존부, 나아가 배상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한 푼이라도 적게 물기 위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당사자에게 제재성 고율이자까지 배상케 하는 것은 민사재판의 근본이념 가운데 하나인 공평성을 부당하게 제약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따라서 행여 판결주문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 나머지 채권자의 전부 승소 또는 극히 일부의 패소라는 경우에는 채무자의 항쟁이 결과적으로 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후로 법원은 채무자가 당하는 고율의 부담에 대하여 심하게 냉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抗爭)함이 상당한 사건에 대하여서도 패소하기만 하면 소장 송달의 다음날부터 연 2할 5푼의 이율을 적용하여 지연손해금을 명하는 사례가 많다. 항소심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싸워도 항소기각이 되는 날이면 제1심판결에 붙은 지연손해금은 수정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가령 항소심에서 4년간에 걸친 장기간 열띤 투쟁을 하고 패소하는 날에는 지연손해금만 원금과 같은 액이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또 상고심에서 얼마나 소송을 끌게 될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고기각이 되는 날을 상상해 보면 머리가 무겁다.
제1심에서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이면서 소장 송달의 다음날부터 연 2할 5푼의 지연손해금을 명하고 항소심에서 2년간이나 싸워 항소기각의 판결이 있은 사건에서, 다른 상고이유와 함께 지연손해금 부분에 대하여서도 다투어 보았으나 허사였다.
「원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피고의 항쟁은 모두 이유 없는 것으로 배척되어 원고가 구하는 금원 전부에 대하여 피고의 이행의무가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고, 기록상 피고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한 것이 상당하다고 보이지도 아니하므로」(대법원 2000. 9. 9. 선고 2000다28612 판결) 원심판결이 옳다는 것이다. 아무리 쟁점을 가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다투어도 패소의 주문이 나오면 속절없이 항쟁함에 상당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고, 이렇게 빈틈을 주지 않는 조치는 아래의 판례(대법원 2002. 9. 10. 선고 2002다34581 판결)에서 절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원심은, 제1심판결이 이 사건 사고로 인하여 원고가 입은 손해액으로 인용한 금액 중 적극적 손해액은 일부 줄여서 인정하였으나, 위자료는 똑같이 인정하고, 소극적 손해액은 원고의 항소를 일부 받아들여 더 많이 인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연손해금은 원심이 인용한 금액 전부에 대하여 피고가 원심판결 선고일까지 그 이행의무의 존부와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이 사건 사고일인 1998. 11. 28.부터 원심판결 선고일인 2002. 5. 17. 까지 민법 소정의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을 때까지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소정의 연25%의 비율에 의한 금원의 지금을 명하였다. 그러나 생명 또는 신체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입게 된 적극적 손해와 소극적 손해 및 정신적 손해는 서로 소송물을 달리하므로 그 손해배상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한지의 여부는 각 손해마다 따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 사건에서 보면, 원심이 인용한 소극적 손해 가운데 원심에서 추가로 인용된 금액과 제1심판결에서보다 줄어든 적극적 손해액에 관하여는 원심판결 선고일까지 피고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되지만, 위자료와 제1심판결이 인용한 소극적 손해액으로서 원심에서도 유지된 금액에 관하여는 원심이 제1심판결과 같은 취지로 원고의 청구가 이유있다고 판단한 이상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1심판결 선고일 다음날부터는 피고가 이 부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이 제1심판결을 인용한 원고의 손해액 중 위자료와 원심에서 유지된 소극적 손해 부분에 대하여도 제1심판결 선고일 다음날부터 원심판결 선고일까지 피고가 그 이행의무의 존부나 범위에 관하여 항쟁함이 상당하다고 보고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3조 제1항의 이율을 적용하지 아니한 것은 위 특례법 제3조의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하여 대법원은 원심판결 중 소극적 손해액과 위자료 부분의 지연손해금에 관한 원고 패소부분을 파기한 것이다.
최근 서울지방법원 이성호(李聖昊) 부장판사의 글(법률신문 2002. 1. 9.)을 재미있게 보았는데, 여기 일부를 소개하기가 값질 것 같다.
「배석판사 시절 부장님과 합의를 하면서 종종 의견 차이를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돈 달라는 소송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상의 법정이율을 언제부터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원고가 소송까지 제기한 마당에 피고의 항변이 일부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 소장 송달 다음날부터 곧바로 이를 적용하여 악덕 채무자를 징벌하자는 것이 주로 나의 주장이었던 반면, 당시에는 1년 만기의 정기예금 이율이 10%를 훌쩍 넘는 때이어서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는데도 부장님께는 법정이율 25%가 채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 하여 그 적용시점을 가급적 늦추고자 제동을 거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과 재경 지원 등을 거쳐 본원 민사항소부장을 맡고 있는 지금 그동안 20여 명의 배석판사들과 함께 재판하여오는 과정에서나 특히 최근에는 1심 단독판사들의 판결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세파의 어려움을 덜 겪어본 젊은 판사들일수록 법정이율 25%를 너무 가볍게 여기지 않나 하는 점이다. 원고가 소장에서 청구한 대로 전부 인용될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피고가 다투어서 청구를 감축하였거나 청구를 일부 기각한 경우에도 인정된 돈에 대해 소장 송달 다음날부터 곧바로 연 25%를 적용한 1심 판결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정기예금이율이 민법상 법정이율인 연 5% 수준에 불과해서 연 25%라면 그보다 무려 5배나 된다.
그러다 보니 인정된 원금 부분은 다투지 않으면서 연 25%의 지연손해금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1심 판결에 항소를 제기하는 경우조차 적잖이 발견된다. 그래서 지연손해금 때문에 다시 조정을 시도하거나 1심 판결을 일부 취소하게 될 때에는 옛 부장님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곤 한다.」
덧붙이는 말
2003. 4. 24. 헌법재판소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의 25% 연체이율에 관한 근거규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2002헌가15). 바로 다음 날인 법의 날. 나는 한국법학원 원장의 자격으로 여러 법조계인사와 함께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오찬을 대접받았는데,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은 조간신문의 보도를 본 몇몇 참석자로부터 좋은 재판을 했다는 격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3조 제1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율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법정이율에 대한 상한이나 하한도 정하지 않는 등 대통령령으로 규정될 내용 및 범위의 기본사항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며, 이는 포괄적인 위임입법으로 헌법 제75조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만일 대통령령이 입법목적만을 고려하여 그 법정이율을 정한다면 되도록 높은 이율일수록 ‘소송지연을 방지하고 권리의무의 신속한 실현과 분쟁처리를 촉진’하는 것이 될 것이나,
이는 승소한 채권자에게 현실적인 실손해 이상의 이득을 주게 되는 반면 채무자에게는 지나친 지연손해를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어 고율 위주만의 입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면서, 현재 이 사건 조항에 따른 시행령이 연 2할 5푼으로 그 법정이율을 정하고 있는 것은 은행의 대출금 연체이율보다도 상당히 높은 것이어서 형평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헌법재판소는 3년 전에 위 법률조항의 개정을 촉구했지만 정부나 국회는 별다른 반응을 ㅂ이지 않고 있었다. 이 결정이 있자 대법원은 전국 법원에 계류중인 30여 만 건의 금전지급 관련 민사사건에 대하여 법이 개정될 때까지 선고를 연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회는 부랴부랴 금년 2월에 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해 본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던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2003. 6. 1.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3조 제1항 본문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이율」을 「연 100분의 40의 범위 안에서 은행법에 의한 금융기관이 적용하는 연체금리 등 경제여건을 감안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이율」로 고쳤다. 그리고 대통령령은 법정이율을 연 20%로 정했다.
현재는 대부업의 등록및금융이용자보호에관한법률(2002. 8. 26. 법률 제6706호)이 있어 대부업의 이자율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율의 상한이 연 100분의 70이고, 그 시행령은 연 100분의 66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은행연체금리는 19%이고, 신용카드회사, 상호저축은행의 연체이자율은 25% 내지 29%라고 하는데, 위 특례법에서 말하는 금전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과 단순한 대부계약에 있어서의 채무불이행의 성격은 다르고, 각각의 입법목적도 다르다.
위 특례법을 개정하는 기회에 이자율만을 고치는 것보다 채무자로 하여금 판결이 확정된 뒤 또는 사실심의 심리가 종결된 뒤로부터 고율의 지연손해금을 부담하도록 하여 채무자도 마음 놓고 상소하면서 다툴 수 있도록 하든가, 아니면 법원이 어느 한도 내에서 재량권을 행사하여 이자율을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논의는 없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