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과 헌법재판소와의 관계에 대하여 논해 보라. 이런 문제가 고시(考試)에서 출제되었다면 수험생으로서는 정확한 답을 작성할 것이지만 기성 법조인들이라면 어떻게 써도 무엇인가 미진한 구석이 남는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리송한 여운이 감돈다는 이야기다.
윤영철(尹永哲) 헌법재판소장은 2002년 9월 창설 14주년의 기념사에서 「우리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길지 않은 기간에 명실상부한 헌법의 수호자이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동안 위헌법률심판(違憲法律審判)을 비롯한 심판사건 8,010건을 접수했는데, 그 중 351건의 법령에 대하여 위헌결정(단순위헌 224건, 헌법불합치 66건, 한정위헌 33건, 한정합헌 28건)을 했고, 164건의 헌법소원(憲法訴願)인용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조규광(曺圭光), 김용준(金容俊) 두 분 헌법재판소장을 거쳐 오는 동안 참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김문희(金汶熙) 변호사는 헌법재판소가 없이 사법부에서 헌법재판을 했다면 헌법재판은 일반사건에 매몰되어 오늘날처럼 헌법이 하나의 규범으로 제대로 살아 숨 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시민과 변호사 2003. 4.)
헌법재판소가 1988년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탄생되었을 때 전통적인 최고사법기관으로서의 대법원은 위헌법률심사권을 빼앗겨 당혹감과 서운한 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법조계에서는 새 살림을 차린 또 하나의 사법기관에 대하여 그 활동을 기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앞으로 전개될 두 사법기관의 관계에 대하여 우려를 갖기도 했다. 당시 헌법재판소의 발족은 법조계의 큰 논의도 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졌다. 헌법의 개정작업을 하면서 정치권이 사법부를 깔보고 별로 염두에 두지 아니했는지, 아니면 사법부 스스로 헌법재판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는지, 그 정황을 알지 못하지만 눈뜨고 있는 대법원을 두고 코 베어 헌법재판소를 만든 것을 보면 후자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 하나의 사법기능을 영위하는 기관을 신설하는데 대하여 사법부가 반대의견을 제시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오히려 법원 측이 헌법재판소의 창설을 묵인했거나 동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법부가 정치적 냄새 짙은 헌법재판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자세였다면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안일하고 어리석은 발상인 것이다. 정치적 의혹사건에 대하여 검찰이 몸을 사리고 수사를 포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정치권은 틀림없이 국정조사를 시도하거나 특별검사제(特別檢事制)를 도입하게 되고, 검찰은 스스로 입지를 좁혀 정치예속을 초래케 하는 위험을 맞게 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설치된 지 14년이 되니 오늘까지 대법원과의 관계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이론적 혼란과 현실적 마찰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자기 존재와 위상을 강화하는 목소리를 낼수록 대법원과의 불협화음이 더해 간다는 인상을 던져주었다. 대법원이 처음부터 헌법재판소의 신설에 동조했다면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존중하고 그 발전을 위하여 협력을 아끼지 않았어야 한다. 대법원이 조금이라도 헌법재판소의 발목을 잡으려한다는 인상을 주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두 기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얼핏 나오는 첫 의문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도대체 어느 쪽이 상위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이 있다면 어느 기관도 다른 일방에 대하여 우월하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해답일 것이다. 그러나 두 기관의 장이 정부의 공식행사장에 참석했을 때는 좋건 싫건 좌석의 순서를 마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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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겪을 때도 있다 (한겨레신문 1996. 4.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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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 정부행사의 주관부서인 행정자치부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여 해답을 얻었을 것인데, 헌법은 법원과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를 독립된 사법기관으로 따로 규정하면서 제5장의 법원 다음에 헌법재판소의 순서를 두었고, 헌법재판소법 제15조는 헌법재판소장의 대우와 보수는 대법원장의 예에 의한다고 할 뿐 특별히 그 서열을 뚜렷이 한 규정은 없다. 만일 헌법소원 사항에 법원의 재판이 포함된다면, 혹은 전직 대법관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 임명되는 일이 있다면 이 문제도 제법 논의를 일으킬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최고법규인 헌법을 토대로 심판하는 사법적 헌법보장기관이며, 위헌법률심판을 비롯하여 대통령의 탄핵심판(彈劾審判)까지 관장한다. 한편 대법원은 포괄적인 재판권을 행사하며, 최고법원(最高法院)으로서의 지위(헌법 제101조 제2항)가 인정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헌법이 두 사법기관을 독립적으로 설정한 조치는 처음부터 두 기관의 대립을 예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대법원장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3인을 추천하고, 운용상으로 현직 법관들을 헌법연구관으로 파견근무를 시킴으로서 교류를 하고 있지만, 조화롭지 않는 분위기는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은 위헌법률심사권을 갖지 않으나 그 제청권(提請權)을 행사하게 되어 있고(헌법 제111조 제1항 제1호, 헌법재판소법 제41조), 당사자가 위헌법률심사의 제청을 신청한 법률에 대하여 법원이 기각을 해버리면 결국 합헌(合憲)을 선언하는 것이 되지만, 이에 불복하는 당사자가 헌법소원(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2항)을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받는다고 하면 두 사법기관의 결론이 상치되고 만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은 명령‧규칙‧처분에 대한 위헌심사권이 있다(헌법 제107조 제2항). 그런데 헌법재판소도 명령‧규칙의 규정 자체에 의한 기본권의 침해에 대하여 헌법소원이 가능하다고 보고, 명령‧규칙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행사하면 두 기관의 권한행사에 충돌이 생기게 된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국 후자의 사례가 일어나고 말았다.
법원은 헌법 제107조 제2항이 대법원의 최종적(最終的) 심사권을 명시하고 있음을 근거로 헌법재판소의 명령‧규칙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부인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대한 최종적 해석기관임을 내세우고 있고, 헌법학계에서도 대법원의 최종적 심사권이 「법원조직 내에서의 최종적 심사권」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헌법재판소는 대법원규칙(大法院規則)을 위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법원의 활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1990. 10. 15. 법무사법시행규칙에 대한 헌법소원사건(89헌마178)에서 법원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대법원규칙(제1108호) 하나를 죽여 버렸다.
「헌법 제107조 제2항은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대법원은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법원행정처장이나 법무부장관은 이 규정을 들어 명령‧규칙의 위헌여부는 대법원에 최종적 심사권이 있으므로 법무사법시행규칙의 위헌성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은 위 헌법규정에 반하여 부적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 제107조 제2항이 규정한 명령‧규칙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심사권이란 구체적인 소송사건에서 명령‧규칙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되었을 경우 법률의 경우와는 달리 헌법재판소에 제청할 것 없이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심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헌법 제111조 제1항 제1호에서 법률의 위헌여부심사권을 헌법재판소에 부여한 이상 통일적인 헌법해석과 규범통제를 위하여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침해를 이유로 하는 헌법소원심판청구사건에 있어서 법률의 하위법규인 명령‧규칙의 위헌여부심사권이 헌법재판소의 관할에 속함은 당연한 것으로서 헌법 제107조 제2항의 규정이 이를 배제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법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령‧규칙 그 자체에 의하여 직접 기본권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하여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위 헌법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위 결정에 대하여 월권(越權)이라고 비난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피살된 대법원규칙이 살아날 방도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