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4월 우리 대학동기들은 부산의 구덕산록에 자리 잡은 가교사에서 입학식을 가졌었다. 전쟁 막바지였을 때다. 그 해 9월 2학기 때부터는 서울로 환도해서 졸업식을 가질 때까지 동숭동의 캠퍼스에서 공부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Fiat justitia ruat caelum). 이것은 부산의 가교사 입구에서부터 걸어 두고 있던 표어다.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과 더불어 서울법대동창회 수상록(1994)의 책이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말인가 괜히 중압감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차츰 익숙하고 보니 법대(法大)에 알맞은 근사한 라틴어 격언이라고 생각되었다.
입학하고 2년 남짓 제법 충실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3학년이 될 때쯤부터는 그만 고시(高試)에 대한 압박과 초조함이 지배하기 시작하고 준비를 하는 동안은 언제나 희망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평생을 통하여 사회적 신분에 영향을 주는 관문이 아닌가. 법대생에게는 외도(外道)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만나면 고시에 대한 정보교환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은근히 경쟁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졸업할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잠복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예 고시를 멀리한 친구들도 많았다. 나중에 학계로 진출하였거나 실업계에서 성공한 동기들이 특히 그렇다.
신동아(新東亞) 1995년 2월호에는 정재영(鄭在永)기자가 쓴 「이회창과 이홍구 서울법대 11기」라는 제목의 우리 동기들에 대한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다. 서두가 재미있다. 우선 가벼운 퀴즈 문제부터 하나 풀어보자. 다음에 열거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홍구(李洪九) 현 국무총리와 이회창(李會昌) 전 국무총리, 이세중(李世中) 대한변협회장과 김태지(金太智) 주일대사, 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최광수(崔侊洙) 씨와 88서울올림픽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김용래(金庸來) 씨, 민정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대순(李大淳) 호남대 총장과 인재(人才) 많은 고시 8회중에서도 선두주자였던 김석휘(金錫輝) 전 법무장관, 서울대에서 헌법학을 연구하는 권영성(權寧星) 교수와 서강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오기평(吳淇坪) 교수, 권오기(權五琦) 동아일보사장과 김창열(金昌悅) 방송위원장, 경제부총리를 지낸 정인용(鄭寅用) 씨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 오재덕(吳在德) 한화그룹부회장, 이휘영(李徽永) 럭키화재해상보험 사장, 대법관을 지낸 김달식(金達植)·박우동(朴禹東)·오성환(吳成煥)·이명희(李明熙)·최재호(崔在護) 변호사와 현재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있는 조승형(趙昇衡) 씨,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낸 구용상(具龍相), 나석호(羅碩昊), 이택돈(李宅敦), 임두빈(任斗彬), 정종택(鄭宗澤), 조남욱(趙南煜)‥‥’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기사의 제목에서 금방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답은 서울대 법대 11기 졸업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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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년 서울대 법대 시절, 친구들과 / 오른쪽에서 2번째가 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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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대 11기는 2명의 총리와 2명의 부총리, 그리고 9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법조계 또한 막강하다.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대법관이 6명이다. 한때는 대법관의 절반을 서울대 법대 11기가 차지한 적도 있다. 지방장관인 도백을 지낸 이가 8명이 되는가 하면 외교관의 꽃 대사가 12명, 나라안팎에서 모두 세를 떨친 셈이다. 선량도 8명 나왔다. 입법 행정 사법 3부 모두가 막강하다. 그뿐이 아니다. 이제는 원로학자로 올라선 학계인사가 16명이다. 언론계 진출도 유난히 두드러진다. 현직 언론사 사장이 3명, 중앙 일간지의 편집 출판국장을 5명 배출했다. 재계에는 사장이 줄잡아 40명 선이 넘는다. 이렇게 서울대 법대 11기는 특정 분야에서만 강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에 두루 걸쳐 인재를 고르게 배출했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어떤 11기 출신의 한 인사는 「우리는 11기 동기의 힘만으로도 국가를 충분히 경영할 수 있는 인재의 집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내용 가운데 나에 대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이명희 변호사와 박우동 변호사 사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사가 하나 있다. 두 사람을 다 잘 아는 K씨가 전하는 이야기다. 지난 71년 이 변호사와 박 변호사가 대전지검 부장검사와 대전지법 부장판사로 나란히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법파동의 여파로 각 도에서는 각각 2명의 ‘요주의 판사’ 옷을 벗기라고 ‘할당’이 내려왔다. 이 부장검사가 보니 리스트에 올라간 인물이 친구인 박 부장판사였다. 이 부장검사는 H 지검장에게 넌지시 운을 떼어 봤으나 사정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취할 만큼 술을 먹었다. 다음날 이 부장검사가 H 지검장에게 ‘우리 충남도에서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합시다’라고 건의하여 박 부장판사를 살려냈다⌟는 이야기이고,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긴 박 판사는 그 후 이 검사와 함께 나란히 대법관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K씨가 누구인지 리스트 같은 것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이명희(李明熙) 부장검사와는 함께 객지생활을 하면서 각별하게 지낸 것은 사실이다. 월요일 아침 8시 나는 대전행열차를 서울역에서 타고 가다가 영등포역이 가까워지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던 그를 불렀다.
낯선 지역에서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때 형사사건을 담당하면서 정보기관에 별로 인기가 없었던 나를 그가 매우 감 싸고 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법관인사에서 재임명(再任命) 절차를 통과하고 서울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쉴 정도로 나는 속으로 걱정했었다. 이 부장검사와는 그 후 서울에서도 가까이 지냈다. 그가 대검찰청 차장검사일 때 나는 법원행정처 차장이었고, 그가 검찰 몫으로 대법원판사가 되었을 때 나도 함께 대법원에서 일하게 되어 여러 어려운 고비를 서로 걱정하고 의논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