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판례라고 하면 대법원 판례를 말한다. 또한 그것은 상고심 재판의 이유 중에 나타난 법률적 판단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는 다른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선례(先例)가 되는 성질의 판단이어야 한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법조 새내기가 사법연수원에 발을 디딘 그날부터 판례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머리를 건드린다. 요즘에 와서는 시험문제부터 판례를 응용하여 출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학창시절부터 대법원 판례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법관으로 임관되거나 변호사로서 법조실무에 종사한 그날부터는 지난날 시험을 보기 위하여 공부하고 기억하던 간식거리쯤 되던 것과는 달리 이제 판례는 사활을 좌우하는 무기로 자리를 차지한다.
다수학설(多數學說)과 판례는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은 또한 바람직하며, 그렇게 되면 「학설‧판례」는 어쩌고 해서 딴 소리 못하게 하는 탄탄한 지위를 얻게 된다. 역량 있는 학자의 연구결과는 판례를 창조하는데 선도역할을 한다. 그러나 판례와 학설이 상치되는 날이면 당연히 판례의 서열이 앞서고 학설은 교과서에 묻히는 신세가 된다. 그렇다. 훌륭한 학설이 있다 해도 어딘가 파묻혀 있는 한 개의 판례를 찾으려 한다. 판사‧검사‧변호사가 기를 쓰고 판례를 검색하는 이유를 알만 하다.
판례라는 말은 재판실무에서 쓰이는 것인데 정작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에는 이런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제3호는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경우」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에서 심판권을 행하도록 규정하면서 판례라는 말을 피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견」이 바로 판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조직법은 다른 조항에서 판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즉 판례의 수집‧간행에 관한 사항이 대법관회의의 의결사항으로 되어 있고(제17조), 재판사무의 지원 및 법률문화의 창달을 위한 판례‧법령 등을 조사‧수집‧편찬하고 관리‧제공하기 위하여 법원도서관을 둔다는 규정(제22조)이 그렇다. 그러나 특별법은 판례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쓰고 있다.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는 「원심판결이 법률‧명령‧규칙 또는 처분에 대하여 대법원 판례와 상반되게 해석한 때」(제3호), 「법률‧명령‧규칙 또는 처분에 대한 해석에 관하여 대법원판례가 없거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는 때」(제4호)를 심리(審理)의 불속행(不續行)으로 처리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그렇다. 소액사건심판법 제3조는 상고 또는 재항고를 하기 위해서는 「대법원의 판례에 상반되는 판단을 한 때」라야 한다고 되어 있고, 민사소송규칙 제131조는 「원심판결이 대법원판례와 상반되는 것을 상고이유로 하는 경우에는 그 판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에는 판례위반을 상고이유로 한다는 명문은 없고, 「상고는 판결에 영향을 미친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의 위반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드는 때에만 할 수 있다」(민사소송법 제423조, 형사소송법 제383조)라고 규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대법원판례를 위반한 원심판결은 직접적으로 법령위반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법령해석의 잘못이 있는 것으로 되는데다가 판결에 영향을 미침이 명백하여 결국 판례위반이야말로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상고이유가 되는 것이다.
판례를 찾는 것도 옛날과 달라졌다. 법원도서관에서 발간하는 대법원판례집, 판례공보, 대법원판결요지집 등 공식적인 간행물이 당연히 절대적인 역할을 해 오다가, 어느 날 시중 출판사의 대법전에 기본법률의 해당 주판례가 삽입되기도 했는데, 요즘에 와서는 법원도서관에서 개발‧제작한 판례검색 전산프로그램에 의하여 가만히 앉아서 손쉽게 판례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대법원 재판연구원(지금의 재판연구관)으로 있던 때가 1969년이었는데, 그 때 가장 신경 쓰는 일 중의 하나가 판례를 찾는 일이었다. 판례의 절대량이 적을 때이지만 사건 해결의 유효사정거리에 있는 판례를 일일이 책장을 넘기면서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아니했다. 대법원이 만일 종전의 판례가 있는 것을 모르고 그와 다른 견해의 판결을 선고하게 되면 나중에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의 판례변경 여부가 논의(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제3호)될 뿐만 아니라 재심사유(민사소송법 제451조 제1항 제1호)가 되어, 지극히 선의의 실수지만 직무상 큰 파장을 초래케 하는 결과가 된다.
판례는 특히 법관에게 귀중한 자료로서 대우를 받는다. 변호사도 의뢰인에게 유리한 판례를 찾는 것 또는 판례를 만들도록 도우는 것, 그것 때문에 역시 신경을 쓰게 된다. 재판을 함에 있어서 그 사건에 적용할 종전의 판례가 있으면 그것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지침이 되어 그에 따라 판결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하여 판례가 없으면 전례 없는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사건일수록 서적 등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서 많은 연구와 토론을 거쳐 결론을 만들게 된다. 시간도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책임도 무겁다. 그것은 하급심뿐만 아니라 상고심도 마찬가지다. 재판실무에서 판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래서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되는 문제인 것이다.
한 번은 내가 모시고 있는 대법원판사(지금의 대법관)께서 이런이런 내용의 판례를 찾아보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도 구체적이지 못한데다가 도대체 언제쯤 나온 것인지 조차 애매한 것이어서, 급히 찾는 까닭을 여쭈었더니, 합의(合議) 때 네 분의 대법원판사 중 한 분이 그런 판례를 본 일이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통에 합의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연기했다면서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판례집을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 없고, 다른 재판연구원에게 물어도 기억이 없다는 대답뿐이고, 마지막으로 대법원판결 원본철까지 뒤져도 그런 판례는 찾지 못했다. 결국 그 대법원판사께서 잘못 기억한 것으로 귀결이 났는데, 그 대법원판사를 모시고 있는 재판연구원에게 ‘주장한 사람이 입증을 해야 하는데, 주심사건의 재판연구원이 며칠 혼이 났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닌가’하고 항의를 해서 점심을 얻어먹긴 했다.
지금은 그렇게 판례를 찾는 쉬운 길이 열려 있지만 또 한편 너무도 많은 양의 판례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비교하면 반드시 편하다고만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대법원이 보통 월 2회의 판결선고기일을 여는데, 선고된 판결 가운데 판례가 될 만한 것을 골라 월 2회에 걸쳐 발행하는 판례공보(判例公報)에 판시사항, 판결요지, 참조조문, 참조판례, 판결내용 이런 순서로 게재한다. 아주 새로운 판례도 있고, 몇 차례 되풀이되는 판례도 있지만 어느 것이나 중요한 판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분량의 판례가 모습을 보이고 있냐 하면 최근의 판례공보 2003. 1. 1.자를 보면, 민사 20건, 일반행정 4건, 세무 8건, 특허 3건, 형사 10건 이렇게 45건이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의 1. 15.자를 보면, 민사 31건, 가사 2건, 일반행정 8건, 세무 2건, 특허 5건, 형사 17건 모두 65건이 게재되고 있다. 법조인들은 이와 같이 한 달에 백 건이 넘는 귀중한 판례를 받아들여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