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에 소속하고 있는 변호사들은 비교적 여유시간을 낼 수 있는 토요일 또는 재판이 없는 월요일에 회의실에 모여 판례를 공부하거나 특별한 분야에 관하여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 많다. 법무법인 광장(Lee&Ko)의 판례연구모임은 법조계에 제법 알려져 있을 만치 열성저기고 꾸준하다.
오늘날의 대형 로펌이 되기 전의 광장. 어느 토요일, 회의실에서 여러 명의 변호사가 둘러앉아 뭔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무슨 일인가 물어 보았더니, 매주 토요일에 모여 변호사 한 사람씩 책임을 맡아 새로 나온 판례를 소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정된 변호사가 일이 바빠서 준비를 못하는 일이 생겨 가끔 유회(流會)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왜 그동안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뉘우치기도 하면서 다음부터 모든 준비는 혼자서 맡겠다고 선언하고, 매주 월요일 정오에 부담 없이 모여 점심을 같이 한 후 바로 판례공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1997. 12. 29. 법원공보 같은 해 11. 15. 자를 교본으로 하여 내가 주재하는 첫 모임을 가졌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월 2회 판례연구모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판례 하나하나를 놓고 대강 주요 판시부분을 읽어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한 개의 판례에 상당한 시간을 쏟으면서 열띤 토론을 전개하는 수도 있다. 미리미리 연구를 못해왔어도 즉석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코멘트를 하는 장면을 보면 변호사들은 참 머리도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판례들은 거의 무사히 넘어가지만 간혹 호된 비판을 받는 수가 있다. 대법관들이 재판연구관의 검토와 합의를 거쳐 내린 판결인지라 설마 흠이 있으랴 해서 무척 조심스럽지만, 항우(項羽)도 낙상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대법원판결도 표면에 나타나는 실수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2003. 2. 20. 선고 2001도6138 판결은 「선고유예의 요건 중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때’ 는 반성의 정도와 양형의 조건을 종합적으로 참작해 형을 선고하지 않더라도 피고인이 다시 범행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사정이 현저하게 기대되는 경우」라며, 「이와 달리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때’가 반드시 피고인이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경우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부인할 경우에는 언제나 선고유예를 할 수 없다고 해석할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반대의 취지에 선 판례를 변경했는데, 변경된 판례(1999. 7. 9. 선고 99도1635 판결, 1999. 11. 12. 선고 99도 3140 판결)들은 「형법 제59조 제1항에 형의 선고를 유예할 수 있는 요건으로서 규정된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때란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경우에는 죄를 뉘우친다고 할 수 없어 형의 선고유예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들은 판례공보에 게재된 직후 일찍이 우리 판례연구모임의 도마에 올린 바 있었다. 이런 판단대로라면 피고인에게 사실상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유죄냐 무죄냐의 기로에 선 사실관계에서 피고인이 도저히 범행을 시인할 도리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래도 만일 죄가 된다면 그때는 깊이 뉘우친다는 논리도 성립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비판이 쏟아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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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관 시절 /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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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지는 것을 대상으로 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하나만 더 들어보고 최근의 판례로 넘어가기로 한다. 대법원 1998. 3. 27. 선고 97누20755 판결은 「구 도로교통법 제78조 제1항 제8호 소정의 음주측정거부를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하려면, 법 제41조 제2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술에 취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공무원의 측정에 불응하여야 하고, 한편 법 제41조 제2항에서 규정하는 경찰공무원의 음주측정은 ‘교통안전과 위험방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또는 ‘법 제41조 제1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경찰공무원은 교통안전과 위험방지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음주측정 요구 당시의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운전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 등을 운전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운전자의 주취운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사후의 음주측정에 의하여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음이 명백하지 않는 한 당해 운전자에 대하여 음주측정을 여전히 요구할 수 있다고 할 것이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그 운전자가 자동차 등을 운전한 장소가 법 제2조 제1호 소정의 도로가 아닌 때에는 법 제41조 제1항의 주취운전금지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볼 여지가 없어 같은 조 제2항 소정의 음주측정거부도 성립할 수 없으며」라고 했다.
여기서 「사후의 음주측정에 의하여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음이 명백하지 않는 한․․․․․․ 음주측정을 여전히 요구할 수 있다」라는 구절의 풀이가 문제되었다. 사후의 음주측정(飮酒測定)에 의하여 음주운전 여부가 가려질 수 있음이 명백한 때를 제외하고 그렇지 않은 한 음주측정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 같은데, 글쎄 몇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의 판례가 인용(引用)한 대법원 1997. 6. 13. 선고 96도3069 판결을 찾아보았더니 역시 「확인할 수 없음이 명백하지 않는 한」 어쩌고 저쩌고 똑같지 않는가. 그 후에도 같은 판례가 나왔다. 대법원 1999. 12. 28. 선고 99도2899 판결이 그렇다.
이렇게 되니까 대법원판결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머리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변호사들의 토론에 부쳐보았다. 한참 웅성웅성 하는 것 같더니 어느 변호사가 자신 있게 한마디 했다.
“확인할 수 없음이 아니라 확인할 수 있음이 맞는데요.”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음이 명백하지 않는 한 경찰공무원은․․․․․․ 음주측정을 요구할 수 있고․․․․․․ 그러면 말이 되네.”
“그렇게 쉬운 오기를 못 보고․․․․․․”
“판례가 줄줄이 답습하고 있는데 오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듣고 보니 그러네, 오기가 아니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판례의 권위만 믿고 끙끙거리다니 우습기도 하다. 어느 변호사가 농담을 했다. 이 판례를 오려서 지니고 다니다가 순경이 음주측정을 요구하면 이를 보여주면서 사후의 음주측정에 의하여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음이 명백하지 않아야만 음주측정이 가능한 것이라고 우기면 경찰도 어리둥절해서 측정을 못할 것이라고 해서 웃었다.
이런 표현은 대법원 2001. 2. 9. 선고 2000다10079 판결에서도 나온다. 「공탁서에 민사소송법 제581조 제1항만을 근거법령으로 기재하였다 하더라도, 변제공탁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음이 확정되지 아니하는 이상 이로써 바로 민사소송법 제581조 제1항에 의한 집행공탁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부정에서 부정, 다시 부정으로 빙빙 꼬아 골치 아픈 문장을 창안해 내는 기술도 여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