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1980. 9. 9. 선고 79다1281 판결은 「원심판결에 의하면 원심은 ․․․․․․정당하고, 거기에 소론과 같은 ․․․위법이 없다」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토막을 판결집에 실린 쉼표도 없는 문장 그대로 소개하면, 「서증의 실질적 증거력에 관하여는 의사표시 기타 법률행위가 기재된 처분문서와 작성자의 견문, 판단, 감정 등을 기제 보고하는 보고문서간의 차이가 있어 처분문서는 그 성립이 인정되면 증서기재의 법률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되나 보고문서는 그 성립이 인정되더라도 문서기재의 사실이 진실한가의 여부는 재판관의 자유심증에 의하는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판결서가 처분문서이기는 하나 그것은 그 판결이 있었던가 또 어떠한 내용의 판결이 있었던가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처분문서라는 뜻일 뿐 판결서 중에서 한 사실판단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용을 불허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판결서도 그 한도 내에서 보고문서라고 볼 것이고 소수설과 같이 판결서를 자유심증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이 아니므로 판결서의 서증으로서의 성질을 위와 같이 보면서 원심거시의 판결서인 갑 제2호증을 기록에 대조하여 검토하면 원심의 사실인정 과정에서 거친 증거판단은 정당하고․․․」라고 되어 있다.
이 판결이유는 1980. 12. 23. 선고 80다359판결에서 글자 하나 틀린 것 없이 답습하고 있었다. 이 판결은 민사판결서의 증거력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수의견은 판결서도 그 내용의 판단 사실에 관하여 법관의 자유심증(自由心證)에 의하여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고, 소수의견은 판결이란 그 본질이 법원의 의사표시이니 그 판결이 인정한 사실을 입증하는 실질적 증거력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대법원판사로 있던 시절 어떤 상고사건에서 이 판례를 인용하는 판결을 써야 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문장을 알기 쉽게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좀 매끄러운 내용으로 바꾼 기억이 난다. 후속 판결들이 무비판적으로 선례를 인용하는 타성을 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잠깐 최근의 판례연구모임을 구경하기로 한다. 거창하게 판례연구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지만 판례학습모임이라고 해야 알맞을 것 같다. 변호사들은 최신 판례에 관한 정보를 알아야 한다. 판례를 통하여 생동하는 최신 법률지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우선 속보형식으로 나오는 간행물에 의하여 어떤 판례가 나왔는가 하는 것을 머리에 넣는 것부터 급하다. 그 비평이나 자세한 검토는 나중에 할 일이다. 그래서 일단 읽고 들어보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고, 즉흥적으로 간단한 코멘트를 주고받는 정도로 회의는 진행되는데, 판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문장이나 형식에 관하여서도 그때그때 논의가 되기도 한다.
판례를 공부하는 모임은 주로 여유시간이 많은 내가 주재한다. 여기 소개하는 대화체(對話體) 말고는 대부분 나 개인의 의견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대법관들의 고뇌가 담긴 작품을 조금이라도 엉뚱하게 흠집 내는 일이 있을까 두렵다. 이러한 생각은 이 책 구석구석 배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① 2001. 2. 13. 선고 99다13737 판결
「주채무자에 해당하는 보험계약자가 보증보험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보험자를 기망하였다는 이유로 보험자가 보증보험계약 체결의 의사표시를 취소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그 보증보험계약의 피보험자인 채권자가 보증보험계약의 채권담보적 기능을 신뢰하여 새로운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면, 피보험자가 그와 같은 기망행위가 있었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이거나, 혹은 피보험자와 보험자 사이에 피보험자가 보험자를 위하여 보험계약자가 제출하는 보증보험계약 체결 소요 서류들이 진정한 것인지 등을 심사할 책임을 지고 보험자는 그와 같은 심사를 거친 서류만을 확인하고 보증보험계약을 체결하도록 미리 약정이 되어 있는데, 피보험자가 그와 같은 서류심사에 있어서 필요한 주의의무를 다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었던 탓으로 보험자가 보증책임을 이행한 후 구상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취소를 가지고 피보험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대법원판결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란 말을 흔하게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판결의 완벽을 위한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에 관한 설시가 길어 본문의 의미에 상처를 주는 감이 듭니다.”
“판결 작성의 테크닉에 속하는 사항인데, 그 취소를 가지고 피보험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해 놓고, 이어 이처럼 긴 예외적 사항을 주의적으로 설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앞의 주취운전에 관한 판결이유에서 「사후의 음주측정에 의하여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 운운하는 그런 예외적 사항을 삽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사후라는 말이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 것인지도(대법원 2002. 3. 15. 선고 2001도7121 판결 참조), 음주측정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사후 측정하여 음주운전 여부를 확인하는 예가 얼마나 허용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란 표현도 좀 아껴 쓰든가 보다 유용하게 쓰였으면 한다.
② 2001. 5. 15. 선고 2001도1391 판결
「형법 제297조, 제298조, 제306조의 규정을 종합하면, 강가나 및 강제추행의 각 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으며, 또한 형법상 강간 및 강제추행죄의 성질은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제10조 제1항, 제2항에 의해 가중처벌되는 경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특별법인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에 친고죄에 관한 형법 제297조, 298조, 제306조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으므로, 형법 제306조는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제10조 제1항 및 제2항의 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하여 여성단체에서 반발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16조는 ‘제6조(관세법위반행위의 가중처벌) 및 제8조(조세포탈의 가중처벌)의 죄에 대한 공소에는 고소 또는 고발을 요하지 아니한다.’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③ 2001. 9. 24. 선고 99다72453 판결
「나아가 위와 같이 위 각 서증의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 있는 한, 그것이 위조되었다는 점에 대한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원고에게 있다고 할 것인데, 같은 취지로 원심이 을 제6호증이 위조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한 것은 정당하고, 거기에 입증책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판결의 이유설명에서 서증의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그만인 것 같은데, 나아가 위조 운운하는 판단은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문서의 진정성립(眞正成立)에 관하여 다툼이 없으면 법원은 그 자백에 구속되어 형식적 증거력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문서의 진정성립을 다투면 증명의 대상이 되며, 거증자(擧證者)가 그 진정성립의 입증책임을 진다(민사소송법 제357조). 사문서는 본인 또는 대리인의 서명이나 날인, 무인이 있는 때에는 진정한 것으로 추정하며(민사소송법 제398조), 작성명의인의 인영(印影)이 그 사람의 인장에 의한 것임이 인정되면 그 날인이 그 사람의 의사에 기한 것이라고 사실상 추정되어 문서 전체의 진정성립이 추정된다(대법원 1989. 4. 25. 선고 88다카6815 판결). 을 제6호증의 진정성립이 인정된다는 것은 원고가 그 성립에 대하여 부지(不知)로서 다투었고, 피고는 증인의 증언 등에 의하여 그 진정성립을 입증했기 때문에 법원은 그 문서의 증거력을 인정했던 것이었다.
위 문서에 대한 증거력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그 문서가 위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문서가 위조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부인(否認)에 속한다. 상대방이 진정한 문서라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형태의 주장이다. 통상 증거항변이라고 일컫는 이런 주장은 엄밀한 의미의 항변(抗辯)이 아니다. 다만 인장도용에 의하여 위조되었다거나 인영이 권한 없이 날인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라면 그것은 인영 자체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되므로 도용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그 진정성립은 추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위조되었다는 점에 대한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원고에게 있다」는 말은 성립된다. 그러나 원고가 을 제6호증에 대하여 단순히 위조되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면 그것은 「부인」에 속한다. 따라서 진정성립에 관한 입증책임이 원고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서증의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 있는 한」 그 위에 위조 운운하는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