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법원에 계류된 사건의 해결책으로서 불가피한 과정의 산물이다. 상고사건기록이 대법원에 송부되면 사건번호가 부여되고 사건배당에 관한 예규(例規)의 엄격한 절차에 따라 주심대법관이 결정된다. 상고이유서와 답변서 등이 접수되면 기록은 주심대법관실에 올라가고 재판연구관의 우선 검토 여부가 결정된다. 민사건 형사건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하여 판결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더라도 사건에 대한 주심(主審)으로 배당이 되지 않으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대법원판례에 대하여 즉석 촌평을 주고받는 장면을 잠시 구경했지만 비판의 말들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정례적으로 많은 판례를 습득하고 토론하면서 종종 지난 날 대법원에서 내린 수많은 재판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안도케 했겠지만 반대로 그 수만큼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판이라는 속성 때문이지 무슨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시각 대법원에서 애쓰는 분들도 마찬가지로 희비의 공산물을 출고하겠지만 누가 웃고 누가 울고 하는 것은 결과론이며 관심사가 아니다. 요리사가 펄쩍펄쩍 뛰는 생선을 도마 위에 놓고 무의식적으로 토막 내는 것처럼 법관도 그런 모습으로 판결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쩌다 잘못 판단하고 만 재판에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아무도 완벽한 재판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오판을 피하는 노력을 경주할 때 법관으로서의 책무는 다 한 것이 된다.
대법원은 하급심과 달리 재판연구관의 조력을 받도록 되어 있다(법원조직법 제24조). 상고심의 법관은 스스로의 지식과 전문적 경험칙의 무장으로 최종 재판에 임하지만 내부적으로 이를 보조하는 방책이 필요한 것이다. 대법관들이 재판연구관으로 하여금 사건의 심리에 필요한 자료의 조사 등을 명하는 스타일은 각 대법관들의 개별적인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재판연구관이 기여하는 정도가 큰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연구관제도는 상고사건에 관하여 그들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적정한 재판을 위하여 판단의 자료를 조사‧연구하여 보고함으로써 대법관의 부담을 줄이고 사건의 능률적인 처리를 도모하기 때문에 유효적절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세사건이나 특허사건과 같은 분야에 대한 재판연구관의 역할은 대단하다. 그 밖에 의료관계사건의 경우도 재판연구관들은 비법률적 사항에 관한 이해와 심증형성을 위하여 많은 연구와 고심을 한다. 지금은 고등법원급의 특허법원(特許法院)이 생겨 지난날과 같은 상고심의 애로는 많이 완화되었다. 대법원판례는 당연히 관여대법관들의 이름으로 나가지만 판례가 만들어진 배후의 그 판결서 초고(礎稿)에는 재판연구관들의 땀방울이 적셔 있다.
나도 대법원판사나 대법관 시절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전속재판연구관들과 공동재판연구관들의 지원을 받아 직무를 수행했고, 그들 중견판사들의 도움이 없으면 막중한 업무처리에 관하여 꿈도 꿀 수 없는 실정이었다. 열에 한 건 신중한 검토와 깊은 연구가 필요한 사건인데다가 상고사건의 폭주로 인한 미제사건의 증가로 인하여 대법관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재판연구관의 재판에 대한 관여가 깊을수록 그 의존도를 비꼬는 「연구관재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유 설명의 장문화, 무분별한 선례의 인용과 같은 유형의 판결이 그 표적으로 되기 쉽다. 나에게 배속된 재판연구관들은 하나같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하여 그분들을 옆에 둔 인연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공직을 그만 둔 이후 지금까지도 간혹 함께 만날 기회를 가지면 재조(在朝)로 돌아간 것처럼 그 시절의 기분이 된다. 그 중에서도 곽동효(郭東曉), 최세모(崔世模), 김택수(金澤秀) 판사 등이 오래 도왔다. 이제는 고위 법관이 된 몇 분을 제외하고 하나 둘 변호사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나의 개업 초기 연구관들이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분들의 담당사건을 수임(受任)해 달라는 요청에는 무조건 응하지 아니했다. 아끼는 후배들의 부담감을 염려해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93년 10월, 대법원을 떠났을 때 「따뜻한 애정으로 저희 재판연구관들에게 온갖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셨던 대법관님의 퇴임을 맞아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담은 분에 넘치는 글이 새겨진 기념패를 받은 바 있는데, 2000년 9월. 66세 생일 때는 또 한 번 「올바른 법조인의 자세와 인간미 넘치는 생활인의 풍도를 가르쳐주신 대법관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라는 감사패를 받았다. 거기에는 위의 세 분 외에 김명길(金明吉), 이영애(李玲愛), 김의열(金義烈), 장준철(張俊哲), 한정덕(韓正悳), 김재구(金在久), 박국수(朴國洙), 이태운(李太云) 판사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상고사건을 처리할 때 구속피고인의 형사상고사건은 아무리 기록이 두터워도 재판연구관의 도움 없이 거의 손수 해결했다. 그 이유는 구속기간의 제한 때문에 어느 사건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하여야 했고, 기록을 재판연구관실에 돌려 검토의견을 받아 본들 다시 기록을 살펴보아야 할뿐 아니라 때로는 심증형성을 위하여 수사기록의 인지보고서까지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중 작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사건의 유‧무죄에 관한 사실인정의 쟁점이 대부분으로서 어려운 법률문제가 별로 없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민사나 행정 등 특별사건과 같은 것은 대개 쟁점이 복잡한 것은 물론이고, 이름 있는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붙어 있을라치면 만만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므로 바로 재판연구관실을 경유케 했다.
재판연구관제도가 생긴 것은 1963년 10월인데, 처음에는 재판연구원이었다가 1976년 12월 재판연구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5년 처음으로 대법원판사마다 1인씩 12인의 초임 고등법원판사를 재판연구원으로 발령했는데, 1975년에는 31인을 지명하여 대법원판사 1인에 2인의 연구관을 두도록 했다. 지금은 대법관마다 전속연구관 3인, 공동연구관 22인, 거기다가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의 수석재판연구관과 선임재판연구관을 합쳐 60인의 방대한 기구로 발전했다. 판례를 생산하는 대법원의 보조기구진용이 이처럼 우수하고 화려한 만큼 앞으로 좀더 진보된 대법원판결의 모습을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