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처럼 자연혈족의 관계는 사람의 출생이라는 사실로부터 생기고,
사망이라는 사실로서 소멸하는 것이며, 인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이런 집안의 송사(訟事)는 좀 드물지만 간혹 심각한 상황으로 법적 투쟁이 전개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이때 제3자로서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의 사람은 담당 법관일 것이다. 집안망신이라는 주변의 조롱과 비난을 무릅쓰고 사건 당사자가 된 그들이야 오죽해서 그랬을까마는, 그러나 우리나라의 미덕이던 오륜(五倫)이 변절되고 무너져 가고 있는 현실임을 생각할 때, 어떤 형태이건 간에 집안 송사는 늘어날 것이고, 어느 날에 가서는 법관도 화해에 부칠 것 없이 일반 사건처럼 바로 판결을 해서 짐을 벗고자 할지 모른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도 사이가 틀어지면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고 원수가 되어 이혼에 따른 재산상의 분쟁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 하여 평생 누구보다도 귀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일반인데, 삐꺽하면 처음 만나기 전의 남남으로 돌아서게 되고, 서로 다른 짝을 만나 지난날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애초 잘못 만났던 것으로 쉽게 이해하면 그만이다. 혼인중의 부부는 촌수(寸數)가 0촌이다. 부모는 1촌, 조부모는 2촌인데, 부부의 관계가 무촌(無寸)이라는 말 그것은 또한 가장 가깝다는 말도 되지만 헤어지면 가장 멀어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처럼 자연혈족의 관계는 사람의 출생이라는 사실로부터 생기고, 사망이라는 사실로서 소멸하는 것이며, 인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정이 떨어져 갈라지면 영원한 타인이 되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부부와는 달리, 혈연(血緣)들은 영원히 남이 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집안 송사에 대하여서는 법원은 가능한 한 판결의 형식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쌍방의 대리인도 인내를 가지고 끈덕지게 양보를 종용하고 화해와 조정으로 사건을 처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다.
팔십이 넘은 노인이 육십이 넘은 외아들을 상대로 부동산의 소유권을 환원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몇 년 전 각각 처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홀아비가 되었는데, 소장(訴狀)을 보면 아들이 바로 새 장가를 들고난 뒤부터 아버지를 돌보지 아니하고 홀대하기 시작해서, 아버지는 그동안 아들에게만 재산을 다 물려주고 출가한 딸들을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려 재산 일부를 딸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등기를 챙겨보았더니, 모든 부동산이 벌써 아들 명의로 부당하게 이전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몰래 소유권보존등기 또는 이전등기를 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명의만 신탁했다는 것이다. 피고가 된 아들은 아버지의 주장이 거짓이며 피고 스스로 사업을 하여 재산을 취득했거나,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증여를 받아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주장하면서 오빠와 새언니를 미워하는 누이들이 아버지를 부추겨 소송을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소송의 내용도 반드시 명쾌하다고 볼 수 없는데다가 목적물의 가액도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부자간의 감정싸움이라는 양상임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법원은 사건을 조정위원회에 회부했다.
조정기일에는 아버지 측의 딸들, 사위들과 아들 측의 손자, 손녀 등 혈육 가족들이 대거 출석하여 어울리지 않게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고집불통이라는 아버지는 아들을 노려보면서 수시로 지팡이를 탕탕 치고 “네 이노오옴”, 대갈(大喝)하여 노여움을 보일 뿐 묻는 말에 대답할 태세도 아니고, 더욱 귀가 멀어 직접적인 대화도 불가능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조정위원들만 쳐다보는 형편이었다. 법리 면으로나 증거 면으로나 원고의 주장이 무리인 것은 원고 대리인도 부인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조정으로 해결해 달라는 눈치였고, 피고도 상대가 상대인 만치 속은 몰라도 겉으로는 판결을 고집하지는 아니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집에 모시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죽어도 아들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딸들 집에 전전하는 팔자를 한탄하는 것이었다. 늙으면 자식 촌수보다 돈 촌수가 가깝다더니,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단계에서 겨우 자식을 상대로 재산상의 송사를 벌이는 이런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조정위원들도 사건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아니하여 난감하기만 했다. 사건의 성질상 판결로서 종결할 것은 아니므로,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해결책을 모색해 보자고 다짐을 하기는 했는데, 남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 노인의 성질을 가족 아무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데다가, 피고인 아들도 재력이 별로 없어 당사자가 무슨 방안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조정위원회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 번째의 조정기일에서 한 번만 더 속행할 것이니 다음 기일까지는 가족회의를 하든가 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결론을 내도록 해 보라고 단단히 이르고, 아버님의 여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 모두의 책임이 아니겠느냐고 나무라기도 했는데, 가족들은 그들대로 조정기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지겨운 노릇이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다음 조정기일을 맞이했는데, 노인이 생존해 있는 동안 거처를 마련하고 매달 얼마씩 생활비를 송금하는 내용으로 한 시간 이상 쌍방을 교대로 설득하여 아슬아슬하게 조정을 성립시켰다. 조정위원회에서 노인의 아들 대신 손자에게 분쟁의 해결을 책임지도록 하고 손자를 집중적으로 설득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남매(男妹)간에 대단치도 않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민사‧형사사건을 십여 차례 되풀이한 보기 딱한 사연을 보기로 한다. 목적물은 전남의 어느 도시에 소재한 46평방미터 대지 위에 건립된 3층 건물.
2000년 11월 어느 날, 피상고인(被上告人)이고 피고(被告)인 의뢰인이 빠른 시일 안에 상고기각의 판결이 되도록 해 달라고 기록을 맡겼다. 빠른 시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늦게 판결이 나도 이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그런 주문은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사건 의뢰인이 어디 그런 걸 모르고 말했겠는가. 승소판결이면서 조속한 마무리, 그런 이상을 표현했을 뿐이다. 상고이유에 대한 답변이니 부담이 적어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다가 사건의 내용은 복잡했지만 상고이유는 변론주의(辯論主義) 위반이라는 법률문제 하나뿐이어서 상고사건 치고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의뢰인은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승소하기만 하면 그동안 겪은 숱한 분쟁이 끝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속히 판결이 되기를 강조했던 것이었다. 사건기록에는 무슨 재판을 이리도 많이 했는가 할 정도로 민사, 형사 각종 심급의 판결들이 붙어 있었지만 쟁점(爭點)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으므로 대강 보아 넘겼다.
이 사건은 문제의 부동산에 대하여 피고명의로 된 소유권이전등기의 말소를 구한 것인데,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96가합2584)과 광주고등법원(99나1085)은 원고의 청구를 배척하는 판결을 했다. 원고는 1남 3녀 중 둘째 여자이고, 피고는 막내 남자, 나중에 보지만 장녀도 원고의 편이 되어 치열한 공방이 전개된다. 형제간에도 큰 고기는 제 망태에 담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의 재산에 대한 욕망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사건의 내용 가운데 문제된 부분만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는 원고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가 되어 있는 위 부동산에 대하여 남동생인 피고가 원고의 대리인을 선임하여 법원에서 명의신탁(名義信託) 해지를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피고에게 이행한다는 제소전화해(提訴前和解)를 하고, 이 조서에 의하여 1991. 12. 6.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했는데, 구 민사소송법 제355조 제2항(현행 제385조 제2항)은 화해를 위하여 대리인의 선임권을 상대방에게 위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그 등기의 효력이 문제되었고, 둘째는 외국에 거주하는 원고가 피고의 간청에 따라 1989. 9. 4. 부동산을 피고에게 이전한다는 약정서를 써서 교부했는데, 그 후 장녀의 반대로 원고가 피고에 대한 증여의 의사표시를 철회하고 장녀인 언니에게 부동산의 사용‧수익권을 위임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교부한 것인지 여부와, 서면에 의한 증여를 철회하는 의사표시의 효력(민법 제555조)이 문제되었고, 셋째는 장녀가 일찍부터 위의 부동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피고에게 명의를 이전하는 약정을 하면서, 장녀로 하여금 건물의 2‧3층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허락했는지 여부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