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회상 (1화)
  제1장 내인생의 고비

인생의기나긴 여정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토막이 어디 한 틈이라도 있으랴마는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어린 날들이 유난히 되새겨진다. 나의 모든 것은 거기서 이미 잉태되었고 나는 다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의식이 싹트기 이전, 그리고 의식이 싹틀 무렵의 의식은 이른 봄날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나오는 새싹과 같다. 유년 시절은 새싹의 시간이다. 천지가 열리고 햇빛이 쏟아지며 비바람에 천둥이 친다. 모든 일이 신기하고 세상은 찬란한 아침이었다.
 
동산 밑에 남향으로 조그만 초가마을이 있었다. 기다란 식장산 옷자락 너머에서 아침 해는 붉게 솟아오르고 석양빛은 계룡산 허리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탁 트인 벌판을 지나 보문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북으로 계족산 너머 금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집을 찾아올 수 있다고 할머니한테 말한 적이 있다. 동서남북으로 솟아 있는 산들이 워낙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그것으로 표적을 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넓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내 어찌 알았으랴. 할머니는 그냥 웃음 짓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의고향집은 앞에 너른 마당이 있고 마당가에 좁다란 논이 있으며 그 너머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냇가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고 맞은편 둑에 늙은 정자나무가 있었다. 여름날 정자나무 그늘 밑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쉬었다. 

   
 
우리집 장독대는 뒤꼍에 있었다. 석류나무와 매화나무가 있고 그 주변에는 봉선화‧채송화‧맨드라미가 가득 피어 있었다. 한쪽에는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봄날 꽃이 피면 참으로 화려했다. 할머니는 밥투정을 하는 나를 안아 살구나무 그늘 아래에서 먹여주곤 했는데 한결 별미였다.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 자장가 소리에 잠을 잤고 저녁에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또 하고 또 하고 날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늘 신기했고 언제 들어도 재미있었다. 

어린 날의 기억 가운데 아직도 큰 자국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 몇 있는데, 그 가운데 맨 처음 것이 글방 사건이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채 윗방에 글방 훈장님을 모셔놓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공부를 시켰는데 어느 날 나를 그 방에 집어넣은 것이다. 아마도 다섯 살 때가 아닌가 싶다.

지필묵이 앞에 있고 천자 책을 안겨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체면 불고란 말이 그럴 때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안채에서 고모가 뛰쳐나와 달래 가지고 도로 그 방에 앉혔는데 그 뒤엔 어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울었는지 요즘도 가끔 생각해 보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고 붓글씨 쓰는 재미에 빨려들었다. 그때부터 해마다 ‘입춘(立春)’ 글씨를 써서 붙였는데 한번은 큰집 할아버지가 내 붓놀림을 보시면서 “그놈 필력이 여간 아니다.”하셨다. 오후에 한 번씩 휴식시간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앞 논에서 얼음 타고 봄가을에는 으레 뒷동산으로 갔다. 온갖 풀과 꽃, 나무 사이로 달음질치며 놀았다. 열 살 넘은 형들이 몇 있었는데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며 신출귀몰했다.
 
타작하는 날은 휴업하는 날인데 말이 일손 돕기지 축제의 날이었다. 짚단을 나르고 여럿이서 점심 먹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도 즐거웠던지….

한번은 사랑채에 큰불이 난 적이 있다. 뱀의 혓바닥 같은 불길이 순식간에 지붕을 뒤덮었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 가뭄 때였던지라 개천이 말라 논물을 릴레이식으로 퍼 날랐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나왔는데 몇 백 명이나 되었던 것 같다. 시집온 지 몇 해 안 되는 숙모가 쇠죽을 쑤다 실수한 모양이었다. 불이 다 잡히고 집에 들어가 보니 물이 철철 흐르는 부엌에서 숙모가 시커멓게 되어 마냥 거기 서 있었다. 집이 무너지기라도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참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 놀라운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 무렵 삼촌을 따라 외갓집에 간 일이 있다. 삼촌은 당시 사법학교에 다녔는데, 싫다고 하는 결혼을 억지로 시켰던 것을 기억한다. 처가댁이 우리 외가와 가까워 겸사겸사 나를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외가에 계셨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외가에 들어서니 외할머니가 뛰쳐나오셨다. 소식도 없이 외손자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또 놀랐으랴. 어머니를 보니 왠지 눈물이 왈칵 솟아났다. 그러나 나는 덥석 품에 안길 수도 없는, 철 지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어린 동생도 있었는데 집에 놓아두고 여기 외롭게 친정에 와 있는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 어머니. 반가움과 그리움과 측은함이 뒤범벅이 된 어둡고 짙은 감정이 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뒷날 외할머니가 몇 차례 집에 오셨는데 늘 내가 큰길까지 배웅했다. 마지막 떠나실 때 일이다. 그날도 내가 따라나섰는데, 동구 밖까지 나갔을 때 날 보고 자꾸만 들어가라 하셨다. 할머니가 아마 다시는 못 오시겠거니,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는 언덕에 서 있고, 꾸부정한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신작로 쪽으로 가시면서 연신 뒤돌아보고 들어가라고 손짓하시던 외할머니. 그때 신작로 버스 타는 데까지 못 따라간 것이 두고두고 죄스러운 생각이 든다.

여름 장마 때는 앞 내가 꽉 차게 시뻘건 황토물이 넘실거리며 흘러갔다. 특히 마을 아래쪽으로 흐르는 큰 내가 범람할 때는 장관이었다. 들판이 온통 하얗게 물바다가 되었다. 논밭이 모두 물에 잠기는 것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연의 힘은 대단했다. 불난 자리에는 흔적이라도 있는데 큰물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도 없이 말끔했다. 장맛비는 흔히 아침에 개었다. 비 갠 뒤 끝에 강물은 더욱 범람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물 구경을 나왔다. 그럴 때 쌍무지개가 뜨는데 그야말로 오색이 영롱했다. 물이 빠질 때 어른들은 들일에 바쁘고 아이들은 물고기 잡느라 바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도 두 차례 물난리를 겪었는데 앞 강물이 넘쳐 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마당가의 보릿짚더미가 둥둥 떠내려가도 속수무책이었다.

아홉 살에 글방 시대가 끝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훈장님은 고향으로 떠나시고 우리는 모두 흩어졌다. 나도 섭섭했지만 할아버지도 매우 허전하셨던 것 같다. 한편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데에 나는 들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첫아이라서 더욱 흥분해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던 그해 봄에 입학해서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가 6학년이었으니 전쟁의 와중에 초등학교를 마친 셈이다. 그 6년간의 이야기는 이루 다 말로 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동창생들끼리 만나면 그 시절 이야기에 밤새는 줄을 모른다. 6‧25전쟁 때 이야기가 나오면 끝이 없듯이.
 
  어릴 때 놀던 동무들 그리워라
  지금은 머얼리로 가 버린 시절

  아, 그리워라. 그리운 옛 동산

  그때 놀던 동무들 그리워라
  지금은 다들 무얼 하고 있는가

해방이 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해 여름 수를 몰고 강둑에 앉아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전 같으면 날마다 저렇게 놀았을 텐데 지금은 저들과 어울릴 수 없으니 긴 세월이 한 토막 흘러간 것을 보았다. 위에 적은 시는 내가 그때 느낀 감정을 적은 것이다. 2학년이 되고서 곡을 붙였는데, 나는 소를 몰고 산이나 강가에 가면서 목청 높여 많이도 불렀다.

그 후 나는 어둠의 골짜기로 한 발 한 발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해(苦海)의 큰 바다로 내던져진 것이다. 만고풍상이라더니 질풍노도의 많은 날을 살았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살아 있기 위해 싸웠다. 살다 보면 정말 신기한 일도 많이 생기는데 마흔이 될 무렵 20여 년 간 잊어버리고 있던 그 노래가 문득 떠오른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무슨 이치인지 모른다. 그 후로 이제까지 또 20년, 날마다 그 노래가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저 세상으로 가셨다. 어머니도 숙모도, 가까웠던 사람들 태반이 가고 없다. 마을도 뒷동산도 다 망가졌다. 나는 지금도 싸우고 있다. 전에는 살아 있기 위해 싸웠는데 지금은 흘러간 어린 날을 되찾기 위해 싸운다.  

이겨야지, 그리하여 어린 날로 돌아가야지. 영원히 변함없는 무구한 날로 돌아가야지. 이 풍진 세상을 건너 아름다운 나라, 찬란한 생명의 나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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