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이웃에 개신교에 다니는 집이 하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데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상당히 개명한 집안이었다. 그 집 아주머니가 어머니한테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그때부터 어머니는 늘 성경책을 옆에 두고 있었다. 교회라는 것도 없었거니와 관절염이 있어 멀리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인데 할아버지가 크게 화내시는 걸 본 일이 있다. 기독교가 일본 사람한테서 주목받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교회가 생기고 하여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새벽에 찬양대가 오고,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우리 동네로 치면 예수 믿는 최고 신자인 셈이었다. 그래서 나도 찬송가를 많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음치에 가까운 이로 노래는 못했지만 ‘요단강 건너서 만나세,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라고 부르는 찬송가가 지금도 내 귀에 익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천당이 햇빛보다 밝다는 그 말이 꼭 천당을 보고 온 사람이 만든 말이 아닌가 싶었다. 안 그러면 무슨 이유로 천국을 그렇게 밝은 데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 것인가.
어머니는 건강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는데 우리 어머니를 왜 이렇게 두셨는가 하여 한스러웠다. 내가 평생 한 일이 여인상 만드는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린 시절 여인네들 속에서 컸고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정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가. 그게 소녀상인 걸 보면 깨끗함에 대한 어떤 희원이 있는 것인데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고승(高僧)을 만나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모든 일은 자의로 된 게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더듬더듬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꼭 주어진 것만큼만 살면 되는 것이다. 더 넉넉(富)해지려고 욕심낼 게 아니었다.
하마터면 나의 소녀상이 버려질 뻔도 했다. 그때가 삼십대 후반 무렵인데 추상미술, 미니멀 미술이 성했을 때였다. 내가 그리로 휩쓸릴 뻔했는데 결단하고 빠져나왔다.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지금도 선한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그림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런 생각은 포기했다. 갈 데까지 갈 뿐이다.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나는 갈 것이다.
그리는 행위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와 그림이 둘일 수 없다. 골방에서 기도하고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 둘은 동시적인 것이지 분리될 일이 아니다. 삶이란 것도 그렇다. 살림하는 것도 기도이고 직장일도 기도이고 노는 것도 기도이고. 불교 말로 하면 모든 일이 다 수행이다.
나는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다 좋아한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나보다 한 뼘쯤이라도 앞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그런 삶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좋은 사람 앞에서는 완전히 굽힐 수 있지만 돈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권력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돈과 권력보다 무서운 것은 명예였다. 그렇지만 나는 명예와 타협하지 않았다. 곧은 것은 꺾일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성경 어딘가에 슬기롭다는 단어가 있는 것 같다. 자기를 이제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얻으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행복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매임 없는 삶이 곧 자유인 것 같다. 나는 자유를 찾아 일생을 헤맸다. 내 일생은 방랑 생활의 연속이었다. 성공이란 것은 없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다. 그림 일만 해도 오십 년을 방황했다.
이제 모든 것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언젠가 실패한 예술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지금 내 나이 팔십이라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종교와 예술은 내게 둘이 아니다. 하나로 합쳐 있다. 내게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그리고 싶은 것이고 그림은 내 인생이고 거기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오늘도 간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