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집에 내려가 별생각 없이 놀고 있었다. 내 모교 사법학교에는 당시 삼촌이 교사로 있었는데 교감 선생으로 공주분이 있었다. 두 분이 서로 얘기하여 나를 공주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취직시켰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집에서 놀고만 있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공주는 객지인 데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차에 동년배 수학 선생과 마음이 맞아 의지가 많이 되었다. 당시 공주읍에는 <내 고향> 다방이 있었고 우리는 그 집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무료함을 달래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나는 그 <내 고향> 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수학 선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 기세로 보아 무슨 일이 난 사람 같았다. 얘기인즉 내 작품에 대한 일이었다. 좀 전에 동창회장이 인사차 교장을 만나러 학교에 왔는데 교장실에 있는 내 석고작품을 보면서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는데 어째 이러냐?’ 하는 얘기를 했다는 말이다. 동창회장은 수학 선생의 선배 어른이지만 내 인격을 모독했다 생각하고 분개하여 달려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다음 날 새벽미사에 가는 길에 동창회장 집에 먼저 들렀다. 무슨 사고가 날 것도 같아 그날은 성경책을 들고 갔다. 잠옷 바람에 나왔는데 마당에 딱 서 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제 내가 자네를 위해 한 말일세.’ 그랬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와 성당으로 갔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아침을 들고 곧바로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는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목재소가 있었다. 쓸 만한 것으로 두 토막을 사 가지고 버스에 싣고 다시 공주고등학교로 갔다.
그 나무를 깎아 가을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것이 입선되었다. 대전 신문에 커다랗게 보도되었다. 그때만 해도 충청남도에서 국전에 입선된 것이 나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고 음력으로 설날이었다. 그날 저녁도 친구와 함께 <내 고향> 다방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동창회장 일행이 얼큰해서 들어오다 나와 마주친 것인데 “내가 그때 자네를 위해 한 말일세.” 하고 다시 말했다. 지난 가을 신문을 보았나 보다 싶었다. 그날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그래도 그때 화가 났던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천만 번 잘한 것 같다. 대학교 삼학년 때 국전에 출품한 일이 있는데 낙선이 되어 크게 낙심했다. 그래서 ‘다시는 공모전에 안 낼 것이다.’ 하고 다짐한 것인데 그만 그 다짐이 깨진 것이다. 그다음 해부터는 연속으로 특선을 하고 나중에는 최연소 심사위원이 되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나를 자극한 그분에게 감사할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평가의 장이 넓고 다양해졌지만 오십 년대, 육십 년대 또 그 뒤로도 한참을 작품을 평가받는 데는 국전밖에 없었다. 공모전으로 내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시대였다. 사실 그때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내 자존심이 밟혔다고 생각한 것인데 참고 또 참았다.
내가 공주를 떠나고, 뒷날 공주에 놀러 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수가 있었는데 잊히지 않았다. 앙금은 길게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복수라는 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다. 뒷날에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세상사 상대적으로 보면 사생결단이 되는 것이지만 입체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거기에 공간을 보태고 시간을 보태고 시간마저 초월할 수 있다면, 영원 속으로 물러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 한 어른을 만나 ‘좋은 스승들이 있었는데 이제 다 돌아가셔서 요즘 혼자서 심심하다.’ 고 했다. 그랬더니 ‘하느님하고 놀면 된다.’고 해서 웃었는데 두고두고 생각해 보니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