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손자가 다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 내가 못한 것을 너는 해 보라고 미국에 보냈더니 아주 미국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내 사는 것 따로 있고 제 사는 것 따로 있다. 하늘 아래에는 멀고 가까운 게 있고 내 나라 네 나라가 있어 마음은 열려 있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품 안의 자식이라 하지만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 마음 안에 있다.
아들 손자네 집을 가자면 비행기로 열네 시간, 차로 네 시간 하여 스무 시간이 걸린다. 요즘같이 교통이 빠른 세상에서도 하루가 걸리는 시간인데 배 타고 가던 옛날에는 몇 달이 필요했다. 아들네가 있는 데는 지구라는 별 저쪽 반대편인데 그쪽이 밤이면 여기는 낮이 되고 내가 아침에 전화를 할라치면 애들 시간으로는 저녁에 받는다. 천리만리 아무리 멀어도 나와 아들 사이에는 촌치의 간격도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멀수록 더 가깝다.
딸네 아이들이 지척에 있는데 멀리 있는 아이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인가. 여기 아이들은 뛰어가면 금방 손에 잡힐 것이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이들은 하루를 가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지척보다 먼 데가 더 가까운 것인가. 마음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손자가 눈에 밟혀 비행기 타고 가끔 갔는데 그 덕에 나이아가라도 보고 그랜드 캐니언도 보고 뉴욕 미술관도 보곤 했다. 미국이란 데는 넓기도 하다. 차를 타고 밤낮으로 달려도 끝이 없다.
나의 청년 시절에는 외국 나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맨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은 1971년 일이다. 세계를 한 바퀴 돌았는데 오천 년 인류 문화 역사를 몇 달 동안 대충 볼 수 있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그런데 서양 말을 못해 유감이었다.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교류할 수 없었다. 세상은 넓고 도처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문화를 이루고 번성했다.
그 무렵 우리 집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코흘리개 시절이었다. 커가면서 공부도 잘하고 속 썩이는 일 없이 대학에도 잘 들어갔다. 아들은 어릴 때 그림을 잘 그렸다. 지금도 우리 집 윗방에는 아들이 여섯 살 때 그린 <눈 오는 날의 하루>를 걸어놓고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 미술 선생이 미술반에 들어가라고 해서 나는 기특해서 도와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더니 갑자기 이과(理科)로 돌아섰다. ‘너 왜 그러냐?’ 했더니 ‘아버지 하는 걸 보니 안 되겠더라.’는 것이다. ‘이놈이 철이 일찍도 들었구나. 그래 잘했노라.’고 했다. 그림 일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니 어려운 일이고 보장이 없는 일이란 것을 일찍 터득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갈 때 이과라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과 비슷한 걸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공과대학 말고 자연대학으로 갔다. 생명에 대한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연대에는 여러 학과가 있었는데 분자생물학과에 친구 교수가 있었다. 당신네 학교에 간다면 어느 학과가 좋겠느냐 했더니 거기가 거기니까 자기한테 보내라 했다. 실은 그때 우리 집 아이는 물리학 쪽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은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다. 졸업하면서 ‘너는 내가 못한 것, 드넓은 세상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 훌륭한 교수를 만나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학문을 찾은 것으로 보였다. 생물학이지만 물리학하고도 상관되는 일을 한다. 아무튼 좋은 대학 교수가 되고 넓은 땅을 밟고 새로운 학문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내 욕심 때문에 먼 데 격리시킨 게 아닌가 후회도 된다. 남들은 지척에서 오순도순 잘도 살건만 손자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는데 손자들은 할아버지 심정을 알아주는 것 같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