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 스승을 만나야 한다. 어떤 이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달라진다. 중국의 옛글에 줄탁동기(啐啄同機: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어미닭과 병아리가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라 해서 사제 간의 특수한 인연을 이야기하는 말이 나온다. 닭이 알을 품고 있다 20일이 지나면 알 속에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가 되면 부리로 껍질을 건드리는데 그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 나는 곳을 쪼아 알을 깨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알 속에서 신호가 없으면 어미는 알을 깨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둥지에 달걀을 열 개쯤 넣어놓고 암탉을 앉혀 품게 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병아리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나왔다. 이상한 것은 둥지 안에 한두 개의 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였다. 그놈은 곤달걀이라 해서 보화가 안 되었다. 알 속에서 병아리의 신호가 없어 어미가 쪼지 않은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해서 생긴 말이 이른바 줄탁(啐啄)이 함께한다는 줄탁동기다.
스승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죽는 날까지 수도 없이 많다. 갓 낳아서는 부모가 스승이요 가족이 스승이며 이웃이 모두 스승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는 추복 속에 큰다. 모든 사람의 돌봄 속에 인생을 배우는 것이다. 아이는 커가면서 스스로 스승을 찾는다. 스승을 찾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
스승은 지척에 널려 있지만 스승은 찾는 사람한테만 다가온다. 찾았다 하더라도 쓰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다. 만나는 것도 운명이요 그것을 기회로 삼는 것도 운명이다. 어찌 보면 전생에서 정해진 인연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말했던가. ‘선험적(先驗的)인 것이 있어야 한다.’ 또 누가 마했던가. ‘타고나야 한다.’ 요새 말로 하면 유전인자라 하는데 그 인자 속에 자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타고난 소질이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가운데 눈을 뜬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은 수도 없이 많지만 잡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보화가 지척에 있어도 내가 줍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사람이 낳고 죽는 것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전적으로 내 뜻에 달려 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엄청난 보물이 산같이 쌓여 있다. 그 보물은 길가에서 누군가 주워가길 기다린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는가. 옛날 어떤 시인이 이렇게 읊었다.
소년은 쉬이 늙고 배워 이룸은 어렵다.
잠깐의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마라.
연못가에 봄풀이 단잠을 깨기도 전에
뜰 앞 오동나무는 가을을 노래한다.
내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인생 팔십이 잠깐인 것 같다. 흐르는 세월이 총알 같다더니 지나온 시간이 정말 순간이었다. 총알보다 더 빠른 것이 인생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를 우리가 사는 것인데 나쁜 삶을 살다 가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러니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찾아야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은 다 스승이다. 위에 높은 데 있는 사람은 큰 스승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승은 모두 저세상으로 가셨고 나는 홀로 앉아 있다. 이제 스승은 책 속에 있다.
젊음의 길 끝에서 나는 조각가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에서 진정한 스승을 만났는데 곧 장욱진 선생과 김종영 선생이었다. 새롭고 영원한 스승들을 만난 것이다.
글방 선생님에서 시작해서 초등학교 때 붓글씨로 히라시마 교장, 해방되고는 문장으로 박봉규 선생, 그림으로 강연환 선생, 대전사범학교에서 그림으로 이동훈 선생, 대학에서 장욱진 선생과 김종영 선생에 이르는 스승 편력을 직선으로 그릴 수 있다.
조선조 말기에 저 아래 남쪽 진도에서 태어나 해남 윤두서와 대흥사 초의 스님, 그리고 서울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난 화가 소치 허련 선생.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 소치 선생의 젊은 날의 역정이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의 스승들은 모두 한눈팔지 않는 특이한 분들이셨다. 탁한 세상을 사셨지만 세속에 물듦이 없었다. 오직 예술을 통해 진리의 길을 실천하셨고, 불의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경계하셨으며, 자기를 다스리는 데는 눈물겹도록 가혹하셨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셨다.
나는 이 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빛나는 스승들을 다 만났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백 번이라도 감사할 만한 큰 행운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노경(老境)을 살면서 베푸는 재미와 즐거움을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