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탐구 (17화)

한 우물을 파되 멀리 보고 서두르지 마라. 누구든 물이 나오지 않으면 서두르게 되고 여기저기 파게 된다. 그러가 보면 끝도 없는 되풀이만 할 뿐이다. 먼 데가 어떤지 보이지 않기에 눈앞의 작은 유혹에 흔들리게 된다. 낮은 단계에서 보면 사방이 온통 악마의 소굴이다.

1965년 무렵 나는 한국적 형태를 만들겠다는 큰 결단을 했다. 내 나이 30대 초반의 일이다. 서양 현대미술의 새 물결이 물밀듯 서울로 흘러 들어오는 때였다. 서양 사람들이 하는 형태를 뒤쫓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난감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의 전통 정신을 잇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근간으로 놓고 세계 미술을 수용하려 한 것이다. 그 생각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돌아보니 외길로 40년을 걸어왔다. 한국 미술 문제와 서구 현대미술 문제. 세계 역사가 내 앞에 있다.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어느 천하장사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겼는데 아마도 제주도로 귀양 가서 쓴 것이 아닐까 싶다.

入於外法 입어외법
出於無法 출어무법
我用我法 아용아법

생각으로 가슴으로 손으로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자유롭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내 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뜻으로 봐서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추사 선생을 일러 조선시대 500년의 대(大)천재라고 하는데 그런 그가 60을 넘기고서야 그런 경계를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술에서 자유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할 일이다.

하느님은 애초에 없던 우주천지를 만드셨다. 무(無)로 유(有)를 만드셨다. 이른바 창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없는 것을 가지고 형태를 만들 수밖에 없다. 있는 것을 써서 새롭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예부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을 한다. 옛것을 참고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두고 본다면 먼저 세계 미술 역사가 옛것이 된다. 옛날 사람들이 이룬 그림들, 곧 동서고금 삼만 년의 역사를 품어 소화해서 새로운 형상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 화가 몬드리안과 레제의 경우 나이 40에 이르러 자기 그림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20에 그림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20년은 해야 자기다운 그림을 만들게 된다는 것인데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린이와 같이 그릴 수 있게 되는데 50년이 걸렸다.” 피카소가 70에 맘대로 그려도 그림이 되었다는 말이고, 추사가 60이 되어 아용아법(我用我法) 곧 내 법대로 그린다 한 것이니 마땅히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찌 내 그림을 만들려고 서두른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 시대에 몇 사람의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욕심내서 될 일이 아니라 탐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것이 얻어지는 것이다. 찾는 가운데 발견되는 것이지 계산에 의해 될 일은 아니란 것이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혹시나 하고 계산하려 한다. 빨리 얻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어른들이 해놓은 여러 일에 대해 관심을 지녔다. 민화와 민속품,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품, 건축과 조각, 그림과 글씨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그런 관심이 중국으로 동남아로 서역으로 중동으로 이집트로 연결되다 그리스 이후의 서양미술과 만나게 되었다. 그다음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의 미술, 아프리카와 태평양권의 조형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지녔다.

내 안에는 세계 미술관이 있다. 세계 명품이 모두 그 안에 있다. 비너스가 있고 이집트 신상이 있고 석굴암 조각이 있고 중국 도자기가 있고 미켈란젤로가 있고 세잔이 있고 자코메티가 있고 부지기수의 아름다운 형상들이 있다.

1971년 나는 세계일주 여행을 했다. 9월부터 크리스마스 때까지 혼자서 한 긴 여행이다. 집에 돌아와 다음 날 국립박물관에 가서 반가사유상을 보았다. 그 다음 날에는 석굴암엘 갔다. 당시에는 석굴암 앞에 매표소가 있었는데 스님이 한 분 앉아 있었다. 스님한테 내가 말했다. “지금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여기 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예술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 날 보고 하신 말씀인즉 “선생께서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요?” 하면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어떤 서양분이 석굴암 안에 들어갔다 나와 “내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내 손에 들려 있다.k” 하더라는 말이다.

나는 지금 40년 전 그때를 회상한다. 진정한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형상 앞에서 나도 모르게 모자를 벗는 것.

어떤 이가 세계문인들한테 ‘당신은 왜 글을 쓰시오?’ 하는 설문지를 돌렸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지 않을 수 없어서’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예술의 무효용성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이다. 예술이란 것은 용도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반 고흐의 경우를 보라. 그는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최고의 화가로 칭송받고 있다. 정작 그의 그림은 평생에 한 점도 팔린 일이 없었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를 세기의 인물로 떠받들고 있다. 환희의 찬가를 바치자니 그의 삶이 너무나 불쌍했다.

나는 한국 형태를 연구하다 세계 미술과 골고루 만났다. 20세기 미술은 서구 중심적이었고 여타의 세계 곧 비서구권 예술은 서구를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의 세게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공동 광장에서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는 모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정신의 표현인데 문명권에서 뒤졌다 해서 정신이 낙후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천 년 전 사람들보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는가.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린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는가. 과학은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정신이 발전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20세기 미술에서는 자연이 사라졌다. 인간도 사라졌다. 20세기의 백 년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인류가 만든 과학으로 인해 인간들이 학살되었다. 이 지구 역사에서 자연이 이처럼 학대당한 시기가 또 어디 있는가. 그런데 예술은 이를 외면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나는 수없이 물어왔다. 20세기 역사를 보자. 아름다움에 앞서 새로운 것을 구했다. 예술은 왜 하는 것인가.

한국적인 것을 찾으면서 이십여 년을 생활하다 보니 내 맘속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 뒤로 또 이십 년을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형태를 연구하기보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가다. 그것은 삶의 문제다.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치는 우리 삶에 그 근간이 있어야 한다. 형태를 찾는 길에서 나는 ‘삶’이란 것을 만났다.

지나온 길은 환히 보이는데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하는 게 즐겁다. 이제 비교하는 마음은 없다. 나는 혼자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괴테는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한다고 했다. 성경에는 진리가 너희를 구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내가 찾으려 한 한국성은 보편성으로 합류했다. 강물이 바다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다음은 형태가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자유가 형태의 생명이다. 그다음은 구원 단계다. 그것은 예수님 말씀,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참 예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