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내가 주로 여인상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가 소녀상뿐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왜 소녀상만 만들게 되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때 묻지 않은 것, 신선한 것, 깨끗한 것,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런 것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일을 계속했다. 어느 날 문득 내 소녀상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 소녀상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형태가 갖는 내면적 표징(表徵)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생각하는 여인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금동미륵반가상이 좋아서였다. 나이 50이 될 무렵부터는 성당(聖堂) 미술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소녀상을 십여 년 만들다 생각하는 여인상을 만들다 성모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나는 많은 성모상을 만들었다. 그러던 가운데 길상사 마당에 관음상 조각을 만들면서 종교와의 만남이 나도 모르게 깊어졌다.
내가 한국성을 탐구한 것과 한국 종교미술이 당면한 토착화 문제는 서로 상관이 있었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장익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안에서 예술과 종교가 점점 가까워졌다. 신부들과의 교류가 넓어지면서 신앙과 예술 문제에 본격적으로 직면했다. 이 모든 일이 내게 어떤 운명의 신호가 아니었을까.
중학교 때 읽은 소설 「레 미제라블」‧「부활」‧「죄와 벌」 등에 심취한 일, 대학에 다니던 시절 불경 공부를 한 일, 한국 불상을 특별히 좋아한 일, 미켈란젤로‧루오‧자코메티의 예술에 매료된 일. 그 모든 일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조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내가 쉰 살이 되었을 때였다. 어떤 날 아침 눈을 뜨면서 ‘아하!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대단한 기쁨이었다. 나에게 어디선가 그냥 환한 것이 온 것이다. 조각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모르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모든 것이 깨지고 모든 것으로 열렸다.
그 어느 날 내가 한 찰나에 빛 속에 놓인 일이 있다. 그 빛은 사랑이고 생명이었다. 거기는 열락(悅樂)이 있는 곳이었다. 그 밝은 빛에는 눈부심이 없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란 말 그대로였다. 이 세상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곳에 내가 잠시 있다 나온 것이다. 의식 세계를 벗어난 어떤 곳이었다.
나는 지금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 맑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예술이 종교로부터 떠난 지 몇 백 년이 되었다. 자고로 위대한 예술은 종교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학문과 예술과 종교가 각각 분리‧독립되어 있다. 통제 기능이 사라졌다. 물질적인 것의 풍요에 비해 정신적인 것의 빈곤이 왔다. 윤리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마저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행복이란 것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의미가 예술을 지배할 때 예술은 쇠퇴하고 예술이 의미를 배제할 때 예술은 공허해진다. 예술이 아름다움만으로 존재한다거나 예술이 종교에 예속된다는 극단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예술과 종교가 함께할 때 서로 풍부해진다는 교황님 말씀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문제다. 삶에서 독립된 미(美)가 존재할 수 있는가. 미는 순결(純潔)의 세계다. 우리는 순결을 되찾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행복도 거기에 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 행복을 찾아 세상 끝까지 헤매었지만 진정한 행복은 거기에 없었다. 우리가 내면으로 돌아올 때 거기에 모든 가치가 기다리고 있다. 예술은 그 끝에서 신성(神性)으로 합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