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나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습성을 지니게 되었다.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어디에 앉으나 나의 눈은 소녀들을 좇는다. 그들의 몸매와 차림새와 표정을 읽는데 몇 년 몇 날을 바라보아도 마냥 좋기만 하다. 티 없이 맑고 꿈으로 가득 찬, 신록(新綠) 같기도 하고 봄의 새 풀 같기도 한 소녀는 나의 어린 날 고향 풍경 같기도 해서 더욱 애틋한 것일까.
직장이 먼 거리로 이사했을 때는 자연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날이 달라지는 가로수 이파리와 이르는 데마다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그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도 이제는 피로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진다. 눈을 감으면 고요가 오고, 고요 속에서 생각이 솟아나는데 그 생각들은 작품의 잔상이기도 하고 어린 날의 산천이 되기도 한다. 이는 참으로 유쾌한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하나로 만드는 요술인데 지나간 날들이 현재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절감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어린 날은 참말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마루에 앉으면 탁 트인 벌판과 물고기가 노는 앞개울과 마냥 흘러만 가는 저편 강물 위로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걸어서 통학‧통근하기를 십팔 년, 그 정겨운 판도여. 거기서 생긴 모든 일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데 결정적 동력이 됨을 실감한다.
산길을 가다 칡뿌리도 캐어 먹고, 보리밭 둑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아침 논두렁길은 개구리 밟을까 조심스러웠다.
한데 그 십 리 길은 지금 내가 서울 거리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보내는 한 시간 길과 맞먹는다. 종로 길 청계천 길을 지나면서 나는 문득문득 고향 생각을 한다. 두 개의 이질적 상황이 번갈아 머릿속을 내왕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이면서 엄연히 하나 되어 나의 현실을 이룬다. 힘겨울 때일수록 고향은 내 어깨를 든든히 받쳐준다.
문명이 발달된다고 해서 사람이 잘 살아지는 건 아니다. 자연에서 한 발만 이탈해도 그만큼 병드는 건데 차라리 원시의 건강성이 부러워질 때가 많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편리하지만 삶으로 가는 길은 무진 힘들다. 부여된 여건 속에서 삶을 생명으로 영위하자면 죽음의 요인을 애써 지워 나가야 하며, 그 지우는 힘은 희생을 치르는 데서만 오기에, 예술작품이란 자기를 열심히 살리고자 싸우는 고통의 소산인가도 싶다.
창작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공사인가. 삶과 죽음이 맞붙는 그 치열한 씨름판에서 나는 나를 유지하는 것만도 벅차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나를 잘 살리고자 하는 욕망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목이 마를 때 어린 날의 뒷산 물을 퍼다 마시고 힘겨워 지칠 때 고향의 벌판에 눕는다. 산은 오늘도 말없이 거기에 있고 물은 오늘도 주야(晝夜)를 흐르는데, 그들은 내 친구요 어머니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열심히 믿는다.
소녀상을 만든다. 해도 해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소녀상을 만든다. 티 없이 맑고 꿈으로 가득 찬 고향산천 같은 형태를 이루어 보고자, 언어를 넘어서 오직 실현하는 것, 불순한 것을 과감히 물리치고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눈을 닦고 다시 마음을 닦는다.
자연은 나의 순진함만큼만 일러주는데 생명의 오묘함을 찾아 오늘은 조금 서둘러 볼까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어디엔가 소녀들만의 조용한 공간이 펼쳐지리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고향 그리워 나는 오늘도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은 소녀상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