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마당에 관음상을 만들어 세웠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가지각색이긴 했으나 대체로 종교 간의 어떤 상징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 같다. 관음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 십 년 된 일이었다. 그에 따른 온갖 문제를 하나하나 다 짚어가면서 빼놓은 것이 없다 할 만큼 폭넓게 배려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 간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예술과 종교, 사회와 인생, 그 모든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관음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또 놓을 장소가 있어야 했다. 그러던 중에 후원자들이 생겨났다. 그 소식을 법정(法頂) 스님이 전해 듣고 길상사 마당에 세우자는 전갈이 왔다.
어느 날 흙을 붙이기 시작했다. 일은 한나절에 다 되었다. 길상사에 전화했다. 주지 스님을 찾은 것인데 뜻밖에도 법정 스님이 받으셨다. 흙 붙인 이야기를 했더니 당장이라도 보러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일은 됐지만 정리를 해야 하니 며칠 후에 보면 좋겠다고 했다. 안목이 높으신 분이라서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을 직감으로 다 알아차리는 듯싶었다. 그리하여 관음보살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1958년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보다 두 해 전에 약 4개월간 불경 공부를 했다. 더 했을 터인데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느라 중단했다. 비원 앞에 있는 대각사라는 절에서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끝내고 나니 겨울방학이 된 것이다. 나는 불경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 예술론(藝術論)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미술대학을 다닐 때는 졸업 때 학점 없는 논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불경을 기조로 한 나의 예술론을 작성했다. 그 기본 생각에는 지금껏 변한 게 없다.
어쨌거나 예술과 종교와 인생, 그것은 나에게 한 덩어리다. 내게는 모든 경전이 다 예술론이다. 내 삶에서는 예술도 종교도 따로 떼놓을 수 없다.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종교는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국경이란 게 있다. 예술에 국경이 있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종교 간에는 눈에 안 보이는 높은 울타리가 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국경이든 울타리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구상에는 각종 생명체가 살고 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다. 만공 스님이 오도송에서 ‘세계는 한 송이 꽃,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민족 간에, 국가 간에, 종교 간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을 했는가
법정 스님은 관음석상을 세우면서 연기문을 만들어 다음과 같이 새겼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날지어다. 나무관세음보살.
내가 천주교 신자인 점을 생각하고 불교와 천주교의 만남을 뜻깊게 고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점안식 예절 중에 스님은 관음과 성모의 상징하는 바가 같다는 점을 대중 앞에서 특별히 강조하셨다. 장익 주교님이 신문 보도를 보시고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전화를 주셨다. 법정 스님과 장 주교는 오랜 친구 간이다. 나는 그날 인사말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가슴속에 오랜 세월 갇혀 있던 한 형상이 크신 스님을 만나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스님이 아니었으면 나타날 수 없는 관음보살이 마당에 설 수 있게 된 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결코 작은 일만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바람을 이 형태에 다 부어넣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형태가 말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불상예술이 다시 새롭게 꽃피는 시절이 오길 바랍니다.” 모든 이의 가슴속에는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모든 신문은 성모님을 닮은 관음보살상이란 표현을 했다.
다 지는 일이지만 적잖이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다 풀렸다. 나의 관음상은 길상사 마당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거기에 서 있다. 만든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 점이 오히려 좋은 일이 된 것이다.
나는 평생 조각 일을 했는데 소녀상만 만들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예수상 빼놓고는 그림도 그렇고 조각도 그렇고 소녀상밖에는 한 일이 없다. 내가 성모상을 만들게 되는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다. 나는 누가 시킨다고 해서 할 사람이 아니다.
관음상은 여성상으로 표현되어 왔다. 상징하는 바가 마음에 꼭 든다. 세상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감싸주는 영원의 어머니다.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고 싶어한 것도 그런 연유다. 일본 법륭사에 있는 백제 관음에 심취한 것도 한 연유다. 어쨌든 나는 꼭 관음상을 만들어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나는 길상사의 관음상을 내 조각 작품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한국 조각가 가운데 아마도 나처럼 불상 조각에서 영향을 크게 받은 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한국 미술 전반에 큰 관심을 두고 한국의 그 모든 만듦의 솜씨를 사랑한다.
젊은 날 그 어려웠던 시절에 내 갈 길을 확실하게 깨우쳐 준 것이 금동미륵반가상이다. 나는 그 길을 35년간 의심 없이 걸어왔다. 그 미륵상이 표징하는 사상이고 형태며, 그 모든 것이 내 지표가 된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의심 없이 일로 매진했다. 대모험이었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다. 오직 그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길을 가는 것뿐이다. 미륵반가상이 가리키는 곳은 내 영원한 꿈의 땅이다. 나의 관음상은 그 길가에 꼭 있어야만 했던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나는 숙제를 하나 푼 기분이다. 큰 짐을 하나 덜어놓고 건너편 언덕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심정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나의 관음상이고 오늘의 관음상이며, 다시 말하자면 내 예술로서의 관음상이란 말이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나의 모든 생각과 바람을 이 형태에 다 부어넣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형태가 말할 것이다.’라고 한 뜻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영원토록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성모님과 관음보살에 대해 그 유사성을 이야기한 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자대비이고 큰 사랑이며, 맑음과 깨끗함과 탈속함, 고귀하고 장엄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 그 자태가 수려‧신성하고 영원의 정경(情景)으로 상징됨에 동서는 한가지다. 이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여성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에 과분한 일이기는 하지만 끝없는 도전이요 갈망이다. 한 원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