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왜 그리나. 이 물음은 50년을 생각했는데도 끝이 없다. 아마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이 또한 50년을 생각했는데도 아름다움이란 것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부질없는 일을 우리는 왜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좋은 그림을 만나면 감격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감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나는 요즘 감격을 잊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 하루 종일 또는 자나 깨나 감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좋은 그림을 만날 때 감격한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도 그런 감격이 있다. 감격이란 무슨 현상일까.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 일한다. 그리는 내가 못 느낀 것을 내 그림을 보고 감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무슨 일일까. 그림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림 속에 감격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 마음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림이라는 표현방식을 통해 가시권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 형상을 통해 감격이라는 충격을 느낀다. 아름다움이란 그런 일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그림이 자유롭게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독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근래 더 그렇다. 그렇다고 그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 내 느낌으로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인데 말이 그렇지 그게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 수수만만의 손길에서 자유롭게 나 혼자 설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다. 길가에 작은 풀들은 저마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림이란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피카소가 한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내가 어린이 같이 그리게 되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화가의 자유란 그렇게 얻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자유를 얻고 싶은 생각을 이제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포기해야 자유가 생긴다는 말일 수도 있다. 자유를 얻으려면 자유라는 그 생각을 놓아야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방하착(放下著)이란 말을 한다. 표류가 된다 해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잊어버리고 싶다. 그 생각을 잊어버림으로 해서 그 생각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수시로 감격이라는 경험을 한다. 새로 나온 봄싹을 만날 때, 벚꽃이 휘날리는 언덕길을 갈 때, 돌 된 아기의 너털웃음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은 어떤 기쁨일는지도 모른다. 그림 그릴 때 그런 기쁨은 없다. 다만 망상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있다. 생각이 중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고요의 시간이 있다. 그림은 이성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감성의 움직임 같은 것도 아니다. 무엇이 어떻게 움직여 그림이 되는 것일까.
화가는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우선 그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그림을 그린다. 어떤 그림이 더 좋은 그림일까. 그것을 재는 잣대(尺)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림을 분별하는 것일까. 그림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없다.
그림을 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 백 년 이백 년의 시간이 걸려 평가되는 수도 있다.
요즘은 그림을 화폐가치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화가는 돈 벌려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림 그리는 마음은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그야말로 순결해서 물듦이 없는 곳이다. 돈은 그림하고 상관이 없다. 그림 그릴 때 마음은 잠시 세상을 떠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이 행위하는 곳은 죄의 물듦이 없는 차원이다. 깨끗한 세계가 있다. 완전히 깨끗한 세계가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그래서 그곳은 차원을 달리하는 곳이란 말을 한 것이다. 완전한 그림은 없다. 완전히 아름다운 그림은 없다. 다만 완전한 곳과의 연결이 있다. 그래서 그림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세계 박물관에는 한없이 많은 그림이 있지만 완전한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사람이 완전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 옳을 성싶다. 그런데도 감격이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진짜 ‘완전함’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감격이 있을까. 비할 수 없이 큰 것, 형언(形言)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있을 것 같다.
만일 내게 지금 꿈이 하나 있다면 완전한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내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로 꿈꾸던 모든 것의 총체적인 것일 수 있다. 그 모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기보다 그것을 만나고 싶다. 어떤 대면(對面)이다. 거기에는 큰 기쁨이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그냥 습관처럼 그림을 그린다. 요즘 알게 된 것인데, 아! 안 된다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밖에 안 되는 것일까. 한 치만큼이라도 나는 진전하는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도 또 선을 넘지 못하고 여기까지다. 나는 매일같이 안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아침에도 확인하고 저녁에도 확인한다. 여전히 잘 안 되는 것, 그 내 흔적을 보면서 나는 쓸쓸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삶인데 덜 된 것을 남겨놓고 결국 나는 가야 한다. 모든 가치, 거기에 대한 물음을 허심탄회하게 내려놓고서 나는 지금 오직 안 된다는 것만을 확인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만이 진실이다. 화가에게 일하는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과정일 뿐이다. 사람이 숨을 쉬듯 화가에게 일이란 숨 쉬는 것과 같다. 일종의 휴식이랄 수 있다.
안다는 것이 무언인가,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귀나 영화는 또 무엇인가. 그 인간적인 것들을 다 바다 건너에 놓아두고 오로지 맑은 것으로 남는 것. 인간은 시원(始原)의 그곳을 그리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