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적인 것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만 영혼이 홀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테레사 수녀의 탈혼(脫魂)이 그런 일이 아닐까.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영혼이 육신적인 것으로 완전히 포박되었을 때 이것이 지옥이 아닐까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양단간의 어디쯤에 있다. 내가 있는 곳은 분명 혼돈의 밤이다. 나는 촛불을 밝혀야 한다. 나의 촛불은 유혹의 바람에 깜빡인다. 나는 열심히 타는 불꽃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림마저 속의 손에서 놀아난다. 불쌍하나 게 따로 없다. 속에 물들어 면역이 된 상태를 이른다. 하루에 단 몇 분쯤이라도 자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다. 하루에 단 몇 순간만이라도 내게 그런 행운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차라리 나의 간절한 기도라야 옳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가끔 생각난다. 뭇 선남선녀를 속인 죄 수미산보다 높다 하신 말.
하이데거는 말한다.
“시인은 근원에 가까이 감으로써 일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 그것은 맑게 하는 일이고 치유의 일이며, 또한 거룩한 것이다.”
오늘의 세상은 치유 받는 차원이 닫혀 있다. 그래서 예술이 성스러운 것의 전달자임을 강조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죄한 사람.’
독일의 대시인 횔덜린의 <시(詩)>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천성적으로 맑음을 타고나야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맑음은 비운 땅에만 고일 수 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하늘이 좋았다. 그래서 파스텔 바다 그림을 많이 그렸다. 바다 색깔은 다양하여 맘대로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하늘 색깔도 다양하여 맘대로 그려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하늘의 구름은 형형색색으로 변화무쌍하여 맘대로 그려도 그런 구름이 있는 것이다. 수평선으로 위아래가 구분되는 군더더기가 없다. 구름은 빨간색‧검정색‧노란색‧파란색 등 온갖 화려한 색깔로 화장을 한다.
하루는 어떤 책을 보는 가운데 바다와 하늘을 좋아하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는 심성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하루는 또 어떤 책을 보는 가운데 영혼의 세계를 바다와 하늘이 있는 풍경에 비유하는 대목이 있었다. 위로는 하늘의 영역, 아래는 물의 영역, 그 경계가 수평선이 된다는 것이다. 이 풍경에서는 수평선이 인간의 의식에 해당한다 하고, 하늘의 영역은 초의식, 바다의 영역은 하의식이라 구분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 진위(眞僞)를 묻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풍경’이라 제목 붙인 그 의도에 매력이 갔다. 양쪽 영역의 경계를 이루는 인간의 의식이 한 찰나에 초의식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부 세계의 가장 아래, 하부 세계의 가장 위에, 그곳 그 경계에서 우리 영혼이 하늘 영역으로 비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알기도 어렵고 증명될 수는 더더구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매우 반가운 말이었다. 상상만 해도 매우 시원한 말이었다.
그 뒷날 바다 그림을 그리는데 한 변화가 생겼다. 물은 이제 바다가 아니라 하의식의 세계이고 하늘은 초의식의 세계라는 인식의 변화다. 그러고 보니 티벳의 만다라 그림이 생각났다. 유럽의 이콘 그림이 생각났다. 말하자면 ‘뜻 그림’이 된 것이다.
하늘이 열리기 이전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그가 세례 받는 가운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분 이마의 땀을 씻어준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수건에 예수님 얼굴이 선연히 찍혀 있었다. 이쪽과 저쪽,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그 두 세계의 풍경이 거기에 있다.
“신은 풀잎을 통해 신호를 보내는데 시인은 그 뜻을 알아듣는다.” 횔덜린 시의 한 구절이다. 천지간에 있는 모든 것이 한 징후일 것이다. 예술가는 한 가닥 풀잎에서 징후를 발견하고 형상으로 발현시킨다. 신의 눈짓을 읽는 이, 영원을 가슴에 담고 있는 이, 하늘의 영역을 그리워하는 이, 유한과 무한 사이에 그 두 개의 영역이 만들어 내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이….
지금은 겨울이다. 봄이 저만치 가까이 오고 있다. 땅을 헤집고 풀잎은 또 솟아오를 것이다. 세월은 쉴 사이 없이 흐른다. 영원의 흐름이다.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을 살고 또 생각한다. 천지간의 모든 것에 대해서다. 훌륭한 모든 이의 삶을 모범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모든 문제를 다 풀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이다. 결말날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살 수 있다. 내 꿈은 큰 데로부터 점점 작은 데로 가는 것 같다. 헛욕심이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오늘 나의 하루를 바로 세우고 싶다.
나는 비탈 언덕에 비스듬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옆에 나와 같은 나무들이 무수히 서 있다. 시간이라는 바람이 우리 사이를 흐른다. 생명의 숨결이 우리 사이를 흐른다. 세월은 영원에서 나왔다. 사랑이 바람이 되어 우리 사이를 흐른다. 비탈 언덕에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세월은 소리 없이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