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미술이 바로 서는 데 장익 주교의 헌신적 노력과 김수환 추기경의 후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 주교는 지금까지 꼭 사십 년간을 미술가들과 동고동락했다. 어디든지 미술가들이 움직이는 데는 장익 주교가 있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한국교회는 미술 문제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많이 겪었는데 장익 주교가 상관하지 않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할 만큼 조언하면서 미술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내가 장익 주교와 연이 닿은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1967년 이른 봄날이었다. 대방동성당으로 오기선 신부를 뵈러 갔다 장익 신부를 처음 만났다. 장 신부는 프랑스에서 온 지 두 달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 창(唱)을 들으러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창이란 것은 방송에서나 더러 듣는 것으로 소리하는 곳을 찾아다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오랜 외국생활을 했는데 고향에 돌아오자 한국 정서의 원초적 ‘꼴’을 찾아 나섰다는 것인데 나보다 두 발짝은 앞서 있는 것 같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만가 지나 장 신부는 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는 교구청으로 놀러 갔는데 매듭 하는 김희진 씨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매듭이란 것을 말로만 듣던 내가 장본인을 만나다니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해 삼월 나는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오기선 신부는 내 영세신부이고 대전에서 한 해 전에 상경하여 대방동성당 주임으로 있었다. 나는 신촌에 짐을 풀고 먼저 오 신부한테 인사를 갔는데 그날 장익 신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걸 일러 운명적 만남이라 할 것이다. 일생을 한동네 권에서 살게 될지 내가 그때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뒤 김수환 추기경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교구청이라는 데가 있는가 보다 했고 추기경은 교회에서 가장 높은 분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그 밖에 자세한 교회 사정은 몰랐던 철부지 신자 시절이었다.
이화여자대학에는 가톨릭학생회 서클이 있었다. 하루는 간부 학생들이 나한테 와서 지도교수가 돼 달라 했다. 이화여자대학은 여학교인 데다 개신교 학교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속에서 천주교라는 것은 그때만 해도 매우 깊은 긴장관계에 있었다. 술과 담배가 없는 곳이고 금남(禁男)의 집이며 학생이 결혼을 했다 하면 퇴학되는 시절이었다. 그런 속에서 지도교수라는 천주교 표지를 걸고 있자면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전에 잘못한 게 한 가지 있어 액땜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전에 잘못한 게 있다는 말은 이런 일이었다. 공주교대에 부임해 6개월이 되었는데 서울 친구한테서 급히 상경을 바란다는 전보가 왔다. 전보를 칠 정도면 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볼 것도 없이 무작정 상경해 그 친구를 만났더니 암말 말고 따라오라 해서 막바로 간 곳이 이화여대 미대 학장실이었다.
학장을 만났는데 좀 있다 총장을 면담하러 간다는 말 끝에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총장 면담 때면 으레 그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라고 했더니 순간 난감한 표정을 하면서 적당히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학장과 교무과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김옥길 총장을 만났다. 이러고저러고 이야기하다 종교는요 하고 묻는데 나는 학장 얼굴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러고 있는데 두 분이 차차 뭐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그때 내가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하고 말하지 못한 일로 가슴이 불편했는데 그때 번뜩 그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얼른 가톨릭학생회 지도교수를 맡는다고 했다.
이화여대 가톨릭학생회(젬마회라 했다) 지도교수를 맡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학생들이 젬마회 몇 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벌인다고 했다. 중강당을 빌리고 시내의 다른 학교 남녀학생들을 초청하여 마당에서 막걸리와 빈대떡 잔치를 한다는 것이다. 이거 큰일 났다 싶어 주야로 걱정이 되었다. 학생들이 꼭 다칠 것만 같고 무슨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생각 끝에 교구청으로 장익 신부를 찾아갔다. 이화여자대학에 여차여차한 일이 생기는데 추기경님이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드디어 행사 날이 되었다. 날씨는 매우 좋았다. 중강당에는 남녀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얼추 시간이 되어가는 듯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연락도 없이 김 추기경과 장익 신부 두 분이 중강당 정문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정각에 행사는 시작되었다. 추기경님을 단상으로 모시고 내가 인사말을 하자 추기경이 한 말씀 했다. 그러고서 그 뒷이야기는 다 잊어버렸다. 사십 년도 넘어 육십 년대 후반 일이니 어찌 기억을 하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려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한 달이 지나고 육 개월이 지나도록 도무지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일 년 뒤에 나는 모교인 서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톨릭학생회가 학교 마당에서 막걸리 장사를 했다 하면 필시 무슨 소리가 났음 직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연한 기우였을까. 나는 그때 생각을 가끔 한다. 추기경이 어쩌자고 그런 행사에 나왔을까. 나야 철이 없어서 그런 제의를 했다손 치더라도…. 지금도 그 궁금함이 가실 줄을 모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장 신부하고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한 번은 어쩐 일이었던지 창천동 우리 집에 함께 있던 중에 성당미술은 그래도 구상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뜻을 비쳤더니 지체 없이 가로막고 추상미술도 구애될 게 없다 했다. 알고 보니 유럽에서는 마네시에(프랑스 화가)처럼 추상 형태만으로도 종교적 심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서 내 의식 세계가 일시에 넓은 데로 열린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