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세월이 잘도 흘러갔다. 1980년쯤으로 생각되는데 강남 성모병원을 지으면서 병실을 비롯해 병원 방마다 십자가상을 걸자는 제안이 있었다. 병원장 신부하고 장 신부하고 다 얘기가 끝난 일이었다. 성모병원 건축 디자인을 맡은 서울대 양승춘 선생이 같이했다. 날 보고 만들라는 말인데 그래서 며칠 동안을 몸살이 날 만큼 열심히 만들었다. 작은 조각이 그렇게 힘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주물공장에서 일천 개의 고상조각을 만들어 병원 방마다 걸었다.
나중에 이백 개를 더 만들어 주었다. 입원환자들이 퇴원할 때 더러 떼어 간다는 것이다. 어려울 때 늘 쳐다보던 고상을 떼어가지고 퇴원한다는 것인데 도로 내놓으라고 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했다. 그래서 모두 천이백 개의 십자고상을 만들어 준 것이다. 병원 측으로부터 얼마간의 사례를 받았는데 가톨릭미술가회 기금으로 적립했다. 아마도 첫 번째 기금 만들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김 추기경 병문안 갔을 때 거기 걸린 십자고상을 보면서 감개가 무량했다. 실로 삼십 년만이 아니던가.
1980년, 그해는 참으로 힘들고 긴 한 해였다. 당시 한강성당을 지으면서 나보고 조각을 하자 했다. 건축으로는 김원 선생. 제대는 금속공예를 하는 강찬균 선생이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그 후 정국은 촌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왔다. 세상은 온통 들떠 있었다.
‘자, 이제 십자가상을 시작하자.’ 했는데 함세웅 신부가 잡혀가 일을 할 수 없었다. 광주사태의 여파였을 것이다. 대학 마당은 최루탄 가스로 매일같이 뒤범벅이었다. 나의 스승 김종영 선생의 덕수궁 현대미술관 회고전을 벌여놓고 있었다. 선생의 탑골공원 3‧1운동 기념탑이 없어진 것도 그해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긴박한 시국 아래 너무도 견디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그 한 해는 정말 내 생애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해였다.
다음 해 여름, 당시 로마에 체류하던 장익 신부한테 부탁하여 초청장을 얻어가지고 훌쩍 서울을 떠났다. 당시 공무원은 초청장이 있어야 외국여행을 할 수 있었다. 교황청 사인이 있는 유별나고 멋진 초청장을 보내왔다.
아무튼 나는 이 나라를 떠나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살 데가 어디일까. 그것을 찾아보려는 여행이었다. 우선 로마로 갔다. 장익 신부는 여러 가지로 애써서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로마에서 내가 과연 살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장 신부는 영문도 모르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꼭 이십 일간을 그렇게 지냈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결심하고 파리로 떠났다. 로마는 아무래도 내가 살 데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장 신부는 파리에 특별한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사람 루카스를 불러 희한한 만남의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래 놓고 못 미더워서인지 그날 밤 기차를 타고 파리로 달려왔다. 왜 그런 일을 꾸몄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루카스는 나와 동년배로 천사 같아 할 만큼 착한 사람이었는데 슐리어바흐 유리화공방에서 일하는 마이스터(Meister)였다. 화가가 그림을 공방에 주면 마이스터는 그 그림을 색유리로 만들어 납선 작업을 한다. 루카스는 그런 장인이었다.
우리 모임은 화가요 동창인 방혜자 선생 집에서 약속이 되었다. 방 선생의 남편 프랑스 사람하고 오스트리아 사람 루카스하고 한국 사람인 나 이렇게 세 나라 사람이 앉아 있는데 장익 신부가 통역을 했다.
정말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말‧독일말‧한국말 이렇게 세 나라 말을 즉석 통역하는데 하나도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국사람 셋이서 말을 하는 것인데 모두가 자기 말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장 신부의 언어 능력은 소문난 일이지만 그렇게 능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루카스의 차를 타고 멀고도 긴 여행을 했다. 그렇게 엄청난 계획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우리는 떠났다. 루카스는 유럽의 유리화에 대한 자료조사를 해가지고 왔고 나는 미술관을 보고 싶었다. 성당을 보는 것은 공동 관심사이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여행이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알프스를 넘고 니스로 해서 칸을 누볐다. 방스 성당 레제 미술관과 피카소 미술관 등을 만났다. 다시 알프스 협곡으로 들어섰다. 긴 산길을 만났다. 경치 좋은 데 앉아 점심도 먹었다. 맑은 물과 푸른 숲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다시 프랑스 땅으로, 독일 땅으로, 스위스 땅으로 우리는 종횡으로 유럽을 누볐다.
어딘가에 매우 작은 마네시에 성당이 있었다. 그 화가의 고향이 아닌가 싶었다. 백 석이 채 안 되는 초라한 성당이었다. 화가 마네시에의 유리화가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젊은 시절 작품부터 여러 차례 만든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경비가 없어 한꺼번에 못한 것 같았다. 옛날 성당이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데가 더러 있었다. 동네에 신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유리화와 크고 작은 미술관을 보고 다녔다. 한두 시간을 달리면 꼭 볼 데가 생겼다.
취리히 공항에서 루카스와 헤어졌다. 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장 신부는 우리 둘을 묶어놓고 무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 뒷날 나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유리화공방이 있는 슐리어바흐로 가서 일주일간 유리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다.
장익 주교는 묘한 일을 하는 묘한 사람들을 잘 찾는 기술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여기저기에 심어놓고 서로 엮어 어떤 문제를 만들게 한다. 장 주교는 비단 미술 분야뿐 아니고 문화 전반에 걸친, 특히 한국적인 것과 짙은 모국 사랑의 색깔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해 여름은 참으로 길었다. 나는 파리에서도 꼭 이십 일간을 지내면서 생각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암스테르담을 거쳐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도 꼭 이십 일간을 생각했다. 여기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안 되겠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내 나라에서 살 사람이다!
미국의 몇 곳을 돌아볼 계획이었으나 모두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일단 포기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와 태풍이 지나간 다음의 고요가 같지는 않을 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