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추기경님,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가 어려운 일에 당면해 있을 때, 그런 고비 고비마다 나를 부추겨 일으켜 세워주셨다. 병상에 계실 때 어찌 계시나 싶어 찾아갔더니 기막힌 위트와 유머로 오히려 나를 기쁘게 해주셨다.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서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마음을 다 쏟아 내실 수 있으신가.
신문에서 또 텔레비전에서 추기경님을 뵙는 날에는 그 일만으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무슨 일로 해서 만나 뵙는 날에는 감격스러워 몇 날이고 가슴이 밝게 타올랐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보니 나한테만 그러신 게 아니었다. 모든 이가 다 ‘나한테만 특별히’ 마음을 베푸신 것 같았다는 것이다.
우리 추기경님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렇게 특별한 분으로 사셨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어려운 데라면 언제나 거기 서 계셨다. 그래서 언 땅도 녹이고 어두운 곳에 남몰래 등불을 밝혀두셨다. 우리네 삶은 고달팠다. 우리는 어려운 세월을 살았다. 추기경님은 고달픈 이들의 벗이었다.
지난해 그날, 며칠 밤낮으로 명동대성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곳에는 조화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곳은 얼마나 화려했던가. 그곳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아무도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우리는 이별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기쁜 표징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왔다. 우리가 이별의 슬픔을 나누려 명동엘 간 게 아니었다. 나는 솔직히 용기를 얻으려 명동에 갔다.
그 분은 우리 가슴에 빛을 두고 가셨다. 참으로 그분은 성자였다. 그 빛은 꺼질 줄 모르는 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그 빛 속에서 서로 사랑하자고 다짐했다. 우리 김수환 추기경님은 지금 그런 우리를 다 보고 계시면서도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1971년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창립미술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 김 추기경님이 장익 신부님과 함께 나오셨다. 그 후부터 미술인들의 큰 행사에는 언제나 추기경님이 게셨다. 1994년부터 3년간에 걸쳐 교회미술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님은 격려 말씀으로 우리를 도와주셨다. 2000년 대희년(大禧年), 미술가들의 큰 잔치 때는 김 추기경님, 정 추기경님, 교황대사님, 문공부장관님 등 어른들이 자리하여 우리가 크게 고무(鼓舞)되었다.
미술가들이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김 추기경님이 계셨다. 한국 교회미술이 토착화되어 가는 과정을 역력히 보고 계셨다. 신앙이 바탕이 된 예술이 한국적 형상으로 성숙해 가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셨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 미술가들만 특별히 사랑하신 줄 알았더니 돌아가시고 보니 모든 평신도 모임에 다니며 격려해 주셨음을 알았다. 박해받는 곳이면 어디나 추기경님이 계셨다. 소외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도 계셨다. 나라가 혼란의 극에 달했을 때 추기경님은 권력자들과 담판을 하셨다.
도대체 우리 김 추기경님은 몸이 몇이나 되셨던가. 그분의 손은 몇 천 개나 있었단 말인가. 여기저기 우리 사회의 고단한 곳에는 언제나 추기경님의 그림자가 있었다. 우리가 나라 일로 답답해할 때면 꼭 추기경이 한 말씀 하셨다. 그렇게 해서 생각의 물꼬를 터주셨다.
아, 지금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 말씀 하셔야 하는데 그분 음성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김수환 추기경님이 안 계신 하늘 아래 서울가톨릭미술가회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나라로 가는 통신이 없어 여기에 한 말씀을 올립니다. 김 추기경님, 오늘 우리 모임에 꼭 참석해 주십시오. 그리고 꼭 긴한 한 말씀 부탁합니다. 우리 회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악수를 청합니다. 아울러 천국 소식도 전해 주십시오. 우리는 잘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술을 잘 봐주십시오. 우리의 예술 안에 거룩함과 밝은 빛을 보태주십시오. 잘 부탁합니다. 사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