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에 십사처 조각을 만들 때 이야기다. 처음 몇 쪽을 만들어 놓고 신부님한테 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명동이란 데가 눈도 많고 한국천주교를 상징하는 데가 돼서 조심스럽기도 했고 겁도 났다. 며칠 후 윤영길 총회장이 키가 커다란 보좌신부를 모시고 왔다. 윤영길 회장은 그림을 많이 좋아하던 분으로 미술계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안다 할 만큼 특별한 분이었다.
만나면 ‘누구는 어떠냐, 누구는 어떠냐?’ 하고 그림 이야기를 묻는데 언젠가는 불쑥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최 선생은 이상해요.’
‘왜 그러시오?’
‘우리나라 화가들에 대해 어떠냐고 물으면 번번이 그분의 좋은 점만 추려 말하니….’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되물었더니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은 누구 이야기를 물으면 나쁜 점만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점이 많은데 굳이 나쁜 점을 찾아 말할 게 뭐냐고 웃었다.
그날 우리는 키가 큰 보좌신부와 함께 우리 동네 술집으로 갔다. 그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나는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한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를 메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골고다에 이르러 죽으시고, 그리고 성모님의 슬픔, 그리고 무덤에 묻힌다.’는 참혹한 현장을 지금 만들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즐거우냐, 이게 웬일이냐?”
신부에게 물었다기보다 일종의 독백이었다. 그때 그 젊은 신부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렸다. 고통의 극을 표현하는 일인데 만들고 있는 나의 현장은 너무도 즐거운 것이다. 이 모순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어쨌거나 예술 행위는 즐거운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만들며 때로 나는 울면서 만드는데 이 일이 즐거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통의 예수님한테 불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리고 만드는 행위는 힘든 일일 것 같지만 일하는 사람 쪽에서 생각하면 더없이 즐겁고 좋은 것이다. 아마도 세상 여러 일 가운데 화가가 일에 빠질 때처럼 좋은 것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요즘도 가끔 명동성당에 갈 때가 있다. 내가 만든 십사처 조각을 둘러보면서 옛날 생각을 한다. 만드는 주제는 고통인데 만드는 사람의 가슴은 기쁘고 즐겁다. 이게 무슨 이치인가.
소래에 피정의 집이 있다. 샬트르 성(聖)바오로수녀회에서 지은 피정의 집이다.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하고 일이 진행될 무렵 조각 만드는 일을 모두 나한테 맡겼다. 내가 수녀원 일을 맡은 것은 명동본원을 새로 지을 때부터였다. 서정희 마리레몽 관구장부터 정 올리버 수녀와 김 젬마루시 관구장에 이르기까지 장장 삼십 년에 걸쳐 한 일이다. 명동본원과 소래 피정의 집은 내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피정의 집 동산에 십사처 조각을 만들 때였다. 밖에 세우는 일은 처음이라서 특별히 마음이 쓰였다. 돌이라는 재료를 쓰기로 정하고 세 쪽을 만들어 현장에 놓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분위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세 쪽을 싣고 가서 피정의 집 마당에 돌작품을 내려놓고 있을 때였다.
올리버 수녀가 나와서 김수환 추기경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전날 쉬러 오셨다 주무시고 점심 들고 오후에 가시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추기경님이 마당으로 나오셨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제일처: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그 작품을 보고 계시는데 예수님 이마에 가시관이 아니라 월계수 가지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실은요. 여기 예수님 이마에 가시관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지우고 월계수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요?”
그랬더니 지체 없이 추기경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야. 이분께서는 승리가 예고된 사형수였어. 그러니 뭐가 틀리는가?”
그 몇 초 동안 참으로 힘들었다. 만일 그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하셨으면 어찌 될 뻔했을까. 새로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창작 의지가 꺾여 일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추기경께서는 그 점을 통찰하시고 내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이런 어른이 계시는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참으로 복을 받은 나라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하셨더라면?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일이고, 그것은 차라리 통쾌한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