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님이 퇴임하여 혜화동으로 가시고 미국도 다녀오시고 이제는 한가하시려나 싶어 비서실에 전화를 했다. 김 유스티나 수녀는 오래전부터 그냥 아는 사이라서 내가 좀 뵙고 싶은데 했더니 내일 오라 했다. 그러기에 용건 없이 놀러 가고 싶다 했다.
다음 날 방에 들어가면서 물었다.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입니까?”
한 시간이라 해서 내가 놀라 수녀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요, 더 드릴까요?”
그래서 나는 ‘아니’라며 웃었다. 용건이 없는 고로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추기경께서 화제를 돌려 이런 이야기가 되었다. 밖에서 무슨 물건을 하나 얻었는데, 주는 사람이 이런 것은 마음을 다 비운 사람 아니면 못 만든다 했다는 것이다. 내가 왠지 긴장이 되어 앞에 놓인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이 십오 분이었다. 그래서 그 화제를 얼른 끝내려고 잘라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마음 비우는 노력을 조금 해보았는데 잘 안 되던데요.”
추기경님이 그 말을 얼른 받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그래. …죽어야 해. …십오 분이 더 있어야 해!”
그래서 모처럼 시원하게 웃었다. 시간이 되어 나오는데 유스티나 수녀님이 날 보고 위층에 가서 좀 보고 가라고 했다.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경당이 있다는 것이다. 보니 얼른 알아차렸다. 손 좀 보았으면 하는 뜻이었다.
바로 일을 시작했다. 교구청 관리과에 이야기하자 일이 빨리 추진되었다. 나무일은 왜관 분도수도원에 맡기고, 감실과 십자가상도 맡기고, 어느 한날한시에 갖고 오라 해서 지금 혜화동경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감실은 돈암동성당을 준비할 때 만든 것을 다시 주물을 뜨고, 십자가상은 우리 집에 그냥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크기가 알맞아 갖다 달았다. 나중에 춘천교구청 경당을 만들 때 그 십자가상을 한 점 걸었고 또 뒷날 오금동성당 기도실을 만들 때도 걸었다. 요즘도 어쩌다 평화방송에 그 연녹색 십자가 예수님상이 화면에 보일 때가 있어 옛일을 생각하게 한다.
유스티나 수녀가 서천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서울로 올라오고 추기경님은 병환이 위중하여 성모병원에 계시는데 마음이 늘 불편하던 차에 유스티나 수녀님과 전화가 되어 병원 좀 보고 싶다 했더니 가자 해서 다음 날 추기경님을 뵈었다. 옷을 깨끗이 입고 의자에 앉아 손님맞이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셨다.
수녀님하고 병실 아주머니의 얘기인즉 추기경님이 늦잠을 자다 아침미사를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런 데다 추기경님이 나보고 ‘밖에 나가서는 말하지 마.’ 하셔서 병실이 온통 폭소판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술 더 떠서 말로가 아니라 만천하에 글로 쓸 것이다 그랬다. 앞에 집사람이 있었는데 한참 쳐다보시더니 무어라 말씀했는데 새겨보니 ‘짝인가?’ 하는 말씀이었다. 한 삼십 분 있었을까, 들어가서부터 나올 때까지 시종 웃음판이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힘드신 중에도 문병 간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저러시는 저 양반은 정말 성자(聖者)구나 했다. 얼마 후 선종(善終)하시고 어떤 방송국에서 취재를 왔길래 “김 추기경님은 성자입니다.” 그랬다. 모든 것은 옛날 일이 되었다. 경당을 만들 때 나는 그런 일로라도 그동안의 고마운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이다.
신촌 지역에서 사십 년이 넘게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언제나 연희동성당 관내에 있었다. 성당 되어가는 일을 사십 년을 보고 산 셈이다. 그중에 최광연 신부를 만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루는 집사람이 성당에 다녀오더니 장익 신부를 만났다는 것이다. 새로 오신 신부님이 서로 가까운 사이인가 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우리 동네 가정방문 오시는 날이라 했다. 어떤 분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학교에 강의가 없는 날이기도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장하고 두 분이 오셨는데 교적을 보시더니 동갑이시네 그러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누가 형인지 따져봅시다.’ 했다. 그랬더니 재볼 것 없다 하고 신부님이 동생을 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짚이는 바가 있어 점검했는데 음력으로 십일월이 같고 생일까지 같았다. 그래서 시(時)를 보자 하고 나는 할머니한테서 듣기를 해 뜰 무렵이었다 했더니 자기는 해 뜨기 전이라 해서 신부님이 형이 되고 내가 동생이 되었다. 작년에 선종하셨는데 병중에 만나 우리가 생년월일이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각각이냐 했더니 사주는 같지만 팔자가 서로 다르다 해서 모처럼 웃었다.
봉천동에 가셔서 성당을 짓고 십자가상을 만들자 해서 달았는데, 대치동에 가셔서 더 큰 성당을 지으면서 그때는 나보고 알아서 전체 성상성물을 해보라 했다. 유리화 만드는 최영심을 불러오고 남편 루카스가 멀리 오스트리아에서 와서 직접 달고, 좌우간 일이 재미있었다.
성모상을 마당에 세우는 날이었다. 열 시 낮 미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총회장부터 성당 간부 신자들이 다 나와 있었고 마침 미사 끝이라서 몇 십 명의 신자들이 지켜보았다. 그 몇 달 전에 성당 안에 십사처 조각을 설치하는 날엔 아무도 없어 섭섭했는데 최광연 신부가 소문을 들었는지 그날은 일찍부터 작업과정을 진두지휘했다.
마침내 대좌 위에 성모상 조각이 올라서게 되고 싸맸던 천 조각을 벗겨내자 성모님 얼굴이 햇빛 속으로 나타났다. 모여 있던 신자들이 일제히 박수로 환영했다. 그때였다. 옆에 서 있던 수녀님이 큰 눈물을 보였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 울었다. 나도 울었다. 성모님 얼굴이 슬프게 보여서일까. 수녀님도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른다 했다. 지금도 생각해 보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당에 있는 사람들이 순간 다 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