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많은 사람이 있다 하나 어찌 한날한시에 태어난 사람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나는 신부요 하나는 예술가로 참으로 세상에 쓰임새 없는 사람들로 말이다. 하기야 나의 스승 김종영 선생은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란 말씀을 한 일이 있다. 최 신부는 잠실에 사실 때 무슨 청승으로 팔십이 다 된 이가 혼자서 밥을 끓여 먹고 살았다. 큰 병이 생겼다 해서 한번은 장익 신부와 같이 만났다.
며칠 후에 다시 만나 스승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인연은 평생에 한 사람만 있어도 큰 행운이란 말을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했다. 집에 와서 몇 날을 곰곰이 생각하는데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여럿 있는데 세 사람이라니 그렇다면 누구누구일까 이리저리 꼽아보게 되었다.
하루는 최 신부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날 말씀이 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셨는데 ‘위로 보냐, 아래로 보냐’ 물었더니 ‘아래 위가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문제는 더 어려워졌는데 나는 위로도 좋은 사람이 있고 아래로도 있고 옆으로도 있는데 어쩔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데 어떤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 가셨다 하고 이내 소식이 들려오길 선종하셨다 했다. 사람이 가고 오는 것은 인정사정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연희동성당에 안상인 신부가 부임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어떤 날 이상한 소식이 생겼는데 집사람이 꾸르실교 교육을 하는 데 뽑혀 간다는 것이다. 거기는 교회생활에 열심하고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들었는데 그때 내 감으로 필시 무슨 일이 생기나 보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성당 내부를 새롭게 고친다는 말과 함께 나보고 일을 하라 했다.
나는 기꺼이 하라는 대로 다 했다. 제대‧독서대‧감실‧십자가‧십자가의 길, 나중에는 성수대까지 만들었다. 훗날 장홍선 신부가 마당을 정리하더니 성모상을 세우자 했다. 몬시뇰 안경렬 신부가 성모상을 축성하여 연희동성당 안팎의 성물과 성상을 다 내 손으로 만들었다. 주일에 성당에 가면 나도 모르게 전체 성상한테 눈이 간다. 안 그런 날이 한 번도 없다. 미사가 끝나면 꼭 성모상 앞을 통해 나온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엄마가 아기를 훑어보는 심정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안상인 신부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포도주를 한 박스씩 들고 왔다. 자기는 예술을 모르니 어떻게 도울지 모른다 하면서 술은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했다. 성상을 만드는데 주임신부가 술을 댄다는 것은 말이 좀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안 신부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성상은 누구를 위해 만드는 것인가. 나를 위해 만드는 것인가. 주임신부를 위해 만드는 것인가. 교회를 위해 만드는 것인가. 미(美)에의 봉사인가.
성상은 그 누구를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가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이란 하느님께 속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찾아 형상으로 만들어 하느님께 도로 바치는 것이 아닐까. 성상 만드는 일로 많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안동 유강하 신부님, 대구 탁 미리암 수녀님, 제주도 허찬란 신부님, 지금은 성함조차 잊어버린 많은 분이 있다.
함세웅 신부님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성당을 지을 때 만났다. 신부님이 한 말씀 하시고 총회장이 한 말씀 하시고 설계자가 한 말씀 하시고, 모두 일이 잘되길 부탁했는데, 그때만 해도 미술가들이 하는 일이 신자들 간에 소통이 어려운 시절이라서 나는 매우 긴장되었다. 어려우면 안 하려고 언제나 마음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세 분 말씀을 다 듣고 이렇게 말했다. 다 옳은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일이 잘되게 하려면 내 맘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도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때 일 초라는 시간은 대단히 긴 것이다. 일 초가 더 지나고서 함 신부님이 ‘그 말 알겠다.’ 하셨다. 말씀은 조용했지만 나한테는 칼같이 느껴졌다. 빠름과 명석함과 판단력이 대단한 분이심을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 긴장된 한순간으로 해서 오히려 깊은 믿음이 생겼다. 그 뒤에 여러 가지로, 여기에 기록하기 복잡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1980년부터 십여 년 동안 교회 일을 하는 데 함 신부님의 큰 도움이 있었다.
돈암동성당의 개축이라 할까, 그때 김병학 신부의 자상한 배려로 나는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모든 것, 설계까지 나한테 전적으로 맡겼다.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사람을 어찌 그렇게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성당을 허물지 않고 보완하여 새롭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만일 집을 헐었다면 그 성당을 만든 외국선교회(성골롬반회)가 얼마나 섭섭했겠는가.
축성식이 있던 날 외국수녀님이 오셔서 감사의 표현을 하시는데 ‘김병학 신부님 참 잘 생각하셨구나!’ 하고 감복했다. 이런 이야기를 남겨도 될 일인지, 일이 다 끝나고 신부님이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그런데 돈을 한 다발 들고 오셨는데 보는 앞에서 절반으로 딱 잘라 신부님 쓰시라 했다. 더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찡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나의 대표작이 성당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나 과연 몇 작품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다. 나는 한국적 형상, 조상의 맥을 잇는 일을 하리라고, 이를 평생의 업으로 삼으리라 결심한 바 있다. 서양 문물이 해일(海溢)처럼 우리나라를 휩쓰는 판국에 그냥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다. 잃어버린 조상의 얼을 찾고 싶었다. 잘했건 잘못했건 그것이 나의 숙명이었다.
명동성당 마당에 예수성심상을 세우고 그날 열한 시 미사 끝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집전하는 축성행사를 했다. 그때 추기경께서 5분 정도의 즉석연설을 하셨는데, 아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나도 안 틀리게 말씀하셨다. 마치 내가 원고를 써서 읽은 것처럼 그렇게 명쾌하게 내 마음을 읽어낸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 지금은 낯설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 친근해질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그렇게 말씀을 마쳤다.
성상 조각을 만들며 한평생. 그 얘기를 다 쓰자면 소설이 한 권은 될 것 같다. 언제나 그랬다. 오늘은 한 치만큼만 더 높이 이르고 싶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