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놀던 고향은 동산 밑에 마을이 있고, 넓은 들판 너머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앞에는 시냇물, 옆으로는 고기 잡고 멱 감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나무 오리나무 울창한 숲 속에서 온갖 새들이 울고 있었다. 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풀 섶과 바위 사이에서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흔한 시골 풍경이다. 누구든지 그러하겠지만 생각할수록 즐거운 것이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산도 들도 하늘도 온통 푸르름 뿐이었다. 초가지붕 위로 눈이 쌓일 때면 참새들이 바빴다.
초등학교 6년은 십 리 길이었다. 신작로길 십 리는 멀기도 했다. 추운 겨울, 무더운 여름날은 더욱 멀었다. 중학교 6년은 들판을 가로질러 시오리 길을 일 년 열두 달 친구도 없이 나 혼자뿐이었다. 논길 밭길이니 사람들이 다닐 까닭이 없고, 오직 농사다. 그냥 저희들 생활 터전인 양 하루 종일 부산하다. 이제 우리 집이 동네 참새들의 총본부가 된 듯싶다.
참새들도 노는 구역이 제가끔 있는 것인지 이 동네에 몰려다니는 놈들이 마흔 마리가량 되는 것 같다. 아침이나 저녁에 마당에 나가 참새 모이를 주고 들어오면 어떤 놈이 신호를 했는지 금세 한마당 왁자지껄 하는 것이다. 방문 앞 작은 주목나무에도 새들이 한 떼씩 와서 놀아준다. 아이들은 장성해서 모두 분가했지만 그 빈자리에 새들이 와서 식구가 오히려 늘었다. 우리집 성모상 발밑에 모이를 줄라치면 주워 먹는 모습이 참으로 어여쁘다.
나무를 심고 돌본 지 55년이고 참새 모이 공세를 시작한 지 반 년이 되었다. 내가 세상에 나와 도무지 한 일이 없었는데 나무에 물 주고 새들 밥 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작품을 한다는 일에도 어떤 바람이 앞서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성취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해서 대접받고 싶은 무엇이 앞서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나와 잘한 일이란 것이 나무에 물 주고 새들 밥 준 것밖에 없구나 하고 말한 뜻은 그런 의미다.
내가 나무를 돌보는 뜻은 오직 저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때문이고, 내가 새들 모이 주는 뜻은 그들 노는 모습을 가까이 보고 싶었을 뿐이지 그 밖에 다른 욕심은 없다. 새들이 있는 깊은 숲 속이면 더욱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자연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간다는 기쁨이 있고, 어린 시절, 그 태어난 땅으로 한 뼘쯤 접근한다는 설렘 같은 것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여러 개의 토막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등 토막마다 숨이 가빠 정신 차릴 새가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쉰의 나이였다. 내게 쉰은 참으로 별난 해였다. 질풍노도의 극을 달렸던 시절 같다. 그다음 해 나는 어떤 잡지에 수필을 쓰면서 ‘두 번째 강’이라 했다. 무서운 강을 하나 건너왔다는 이야기다. 한 찰나에 나의 전 생애를 보았다 한 것이 그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살기 힘든 때였다. 세상 말로 하자면 이른바 절망의 계절이다. 그날 그 어떤 찰나(刹那)에 ‘나’가 보였는데 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완전한 없음’이란 말이 어느 정도 근사하나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은 내가 다 잘못한 것이었고, 거기 누가 있는데 또 빛 속에서 내가 있는 것인데 참으로 좋았다!
그 무렵 내게 또 하나의 신기한 일이 있었다. 내가 하늘 저쪽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 내가 저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어느 순간에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전에는 저쪽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기 오고 있는 ‘나’는 보기에 좋았다.
나는 빨리 오라고 불렀다. 지금도 재촉하고 있다. 두 개의 ‘나’가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나로 되었다가 그중 하나가 저 안으로 더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거기를 ‘아침의 나라’라고 이름 지어 놓고 있다. 순백의 빛, 그것은 사랑의 빛이고 또 그것은 생명 자체인 그곳. 나는 거기를 ‘사랑의 나라’라고 이름하여 놓고 나의 이 삶 자체가 거기를 향한 기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