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 나이 마흔이 되기 몇 해 전의 일이다. 나는 학교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연구실이 없던 시절이라 창밖에 공터가 있어 석고 붙이기 작업을 하는데 한 찰나에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내가 대학 1학년 때부터 그때까지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만들어 온 여러 작품들이 한 줄로 쫙 서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순서대로, 한 줄로, 순간에 말이다. 그런 일은 들어보지도 못했거니와 생각조차 한 일이 없었는데 예고 없이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바로 그때 친구가 저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에 ‘여보, 여보’ 하고 불러 세워 ‘내 머릿속이 지금 이상하다.’ 하고 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갈 길이 안개 속으로 내려다보이는 듯 하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찰나에 내가 만든 여러 작품이, 그것도 순서대로 한 줄로 섰는가. 믿을 수 없는 일 같지만 진정 사실이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내 나이 마흔이 좀 넘어서였다. 문간방을 헐어내고 작업실을 만들어 쓰고 있을 때의 일이다. 방에 누워있기가 어려웠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작업실로 나가라고 말이다. 이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사실이다. 어디서 무슨 이상한 신호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루 이틀이면 심리적 현상이라 했겠는데 이삼 년은 그랬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인지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속적으로 나를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가톨릭미술가회전을 앞두고 출품할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두 손을 귀에 대고 소리를 듣는 여인상이었다. 그것을 만들 때 나는 찬송가 가락에 노랫말을 만들어 부르면서 일했다. ‘주님의 음성 들려오니 내게 이 무슨 큰 복인가.’ ‘하느님의 음성 내게 들려온다.’ 라고 명제했다. 고쳐서 <신의 음성>이라고만 했다. 훗날 독일 조각가 발라크의 화집을 보던 중에 두 손을 귀에 대고 소리를 듣는 작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연의 일치에 대해 쾌소(快笑)한 적이 있었다.
마흔이 되기 전 어느 날 그때까지 만든 조각들이 찰나에 한 줄로 서는 것을 본 것, 그 뒤 어디로부터인가 지속적으로 무슨 신호 같은 것이 들려왔다는 것, 쉰 살에 전 생애를 한 순간에 보았다는 것, ‘나’를 보았다는 것, 그런데 한 일이 완전히 없었다는 것, 내가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 빛과 사랑을 본다는 것…. 이 모든 일이 한 줄로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것만 소리가 아니다. 앞에 내가 본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는데, 모두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본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 자기가 눈으로 본 것과 알고 납득한 것만 있다고 믿는다. 나는 안 보이는 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한 곳을 찬란한 아침의 나라라고 이름 짓고 그리워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
지난겨울 내가 참새 모이를 처음 주던 때는, 그들은 한 입 먹고 고개를 바짝 쳐들고 경계를 했다. 어디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후드득 담 너머로 달아났다. 길 건너 앞집 목련나무가 우리 동네 참새들의 총본부였다. 거기서 모여 하루를 시작하고, 거기서 망을 보다 우리 집 마당에 오는 것이다.
마흔 마리의 참새들이 마당에서 모이를 주워 먹는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꽃 피는 4월이었는데 산란기가 되었는지 그때부터는 쌍쌍이 다녔다. 달이 갈수록 새들은 경계를 늦추었다. 지금은 마당에 사람이 있어도 참새들이 그냥 나무에 앉아 있다. 우리 집 마당은 이제 새들의 것이 되었다. 내가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이다.
내가 세상에 나와 한 일이란 나무에 물 주고 새 밥 준 것밖에 없구나 생각하면서 웃었다. 인생이 이런 것인가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흐뭇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우주 안에서 생명 현상에 대한 자그마한 기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흐뭇함이 있는 것이다. 다른 생명을 먹고 쓰기만 했지 생명에 기여한 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 가운데 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 하신 일이 있고, 계명을 묻는 대목에서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이라 하신 일이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요새 너무 많이 쓰이고 있다. 유행가를 들어보면 맨 사랑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이란 단어가 속화되고 힘이 없어지고 쓰기가 민망할 정도로 퇴색했다.
봄만 되면, 또 가을만 되면 가로수 자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 같다. 식목일에 가끔 소개되는 나무 심는 노인이 있다. 몇 십 년간 몇 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돌보는데 자식 돌보듯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루어 온갖 동물이 노닐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생명 현상에 대한 기여, 사랑의 보살행. 나무가 목마를까 봐 물을 주면서, 참새들 와서 놀아 달라고 모이를 주면서 지난 세월 내 인생이란 것을 돌이켜 본다. 삶이란 무엇이며 그림이란 무엇인가.
나뭇잎이 무성하게 돋아나고 있다. 새들이 노래하며 열심히 놀고 있다. 저 생명의 숨결을 있게 하는 에너지가 근원(根源)하는 곳이 어디인가. 생명의 바다, 사랑의 바다, 빛의 바다, 기쁨의 바다, 영원의 바다, 향(向)을 그곳으로 하고 목숨을 그곳에 묻을 때 삶에 향기가 배어 오르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