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2년 4개월 전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생겼다. 1982년 10월 20일 하고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의 일이다. 당시 잡지 「문학사상」에는 소설가 강석경이 예술가들을 취재해 글을 쓰는 난(欄)이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내 집에 세 번 왔는데, 두 번째로 온 날이었다. 내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나갔다. 몇 시간이고 이야기가 길어지다 끝에 가서 나는 꼭 종교의 문제를 끄집어냈다. 그 둘째 날 이야기도 끝에 가서 종교 쪽으로 갔다. 그러다 다음날을 약속하고 강석경은 돌아갔다.
그날은 이른 저녁을 먹었던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를 떠나보내고, 나와 집사람은 도로 그 자리에 앉아 종교의 화제로 신앙의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래야 옳은가 저래야 옳은가 매우 까다롭고 깊은 문제였다.
앉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갑자기 굉장한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설명이 불가능하다. 빛이 번쩍한 것 같기도 하고 앞에 엄청난 누군가가 딱 나타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순간 나의 의식세계는 끝났다.
의식과 잠재의식과 그런 모든 것이 갑자기 중단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식이 중단된 상태가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른다. 평상의 의식으로 회복되었을 때는 그 빈 시간동안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날 저녁을 지냈다.
다음 날 일어나 어제 일을 생각하던 중에 문득 어떤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맨 먼저 집사람에게 우리가 식탁에 앉아 얘기하고 있을 때 당신이 불을 켰다 껐다 한 일이 있는지 물었고, 그런 일이 없었다기에 뒷집 방에서 갑자기 불을 켰냐고 물었다. 우리 집 식당은 뒷집에서 일 미터 거리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 집 지하실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식당에서 보면 창 아래쪽이었다.
우리 집 식당에 불이 없을 때 그 집에서 불을 켜면 불빛이 식당 안으로 환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불현 듯 일어나 큰절을 하며 엎드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앉아서 무어라 얘기를 하고 웃다가 울다가 해서 이상한 예감이 들어 자기는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참으로 그 일은 놀랍고 두렵고 충격이었으며 그때 감정을 어떻다고 설명하기란 어렵다. 더듬어서 그때 감정을 무어라 설명한다면 그게 확실히 묘사될 일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그냥 두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그것을 일이라 할지 사건이라 할지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 바닥에 앉았다. 실로 엄청난 분을 만난 것이다.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다.
나는 절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절을 올리고 앉았을 때 내가 살아온 일생이 다 보였다. 찰나였다. 필름으로 보는 영화 장면처럼 또렷했다. 그 찰나에 나의 전체, 나의 현재가 너무나도 명료하게 보였다.
모든 것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내 입에서 거침없이 나온 말이다. 어찌나 명료하게 내가 살아온 전체와 현재가 잘 나타나 있는지 변명이란 것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틈도 융통성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하아얀 종이에 바늘 끝으로 점 하나 찍은 흔적조차 없었다. 내 업적이란 것이, 살아온 흔적이 그렇게 완전한 무(無)였다.
내 앞에 그분이 계셨다.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형상으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앞에 나와 마주하는 분이 계셨다. 내 주변은 전체가 빛이었다. 나도 빛이었다. 나는 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육체로는 아니었다. 앞에 있는 식탁이나 그런 것들도 모두 빛으로 있었다. 아무튼 전체가 빛으로만 있었을 뿐 물체는 없었다. 그분은, 지금 나와 마주하는 그분은 물론 빛이었다. 나는 웃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분이 바로 여기 계신 것을…, 하는 내 직감이 웃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내가 그토록 찾던 그분은 먼 데 계시지 않고 나와 함께 늘 마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안 것이다. 당신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전부터 그렇게 계신 것이다. 그분은 아주 좋은 분이셨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근엄하지도 않은 분이셨다. 매우 친근한 분이셨다.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고 좋은 선배 같았다. 그렇게 편안한 분이셨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분이셨다. 그러니까 내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전부터 본래부터’ 그렇게 계셨다. 기가 막혔다. 이분이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