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위로부터 무진장 쏟아졌다. 굉장한, 말로 할 수 없는 밝고 맑은 빛이었다. 처음에는 금빛에 가까운 빛이었다. 그분과 나를 볼 때는 그랬다.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순백(純白)에 가까운 빛이었다.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빛이 그 생명의 빛이 소리도 없이 무진장 쏟아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 자체가 된 것이다. 온몸의 상태가 도저히 말로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기쁨이라 할지 열락(悅樂)이라 할지 말로는 그 좋은 상태를 절대 표현할 수 없었다.
거기는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하는 말로 영원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공간이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 그것은 설명조차 필요치 않은 ‘분명함’의 영원이었다. 모든 것은 사랑의 빛 안에서 도무지 구별이 없었다. 모든 것은 무시간(無時間) 속에서 일체였다. 그것은 생명이고 사랑 자체였다. 나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빛 안에 있었다. 이상한 것은 분명히 있는 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어라고 열심히 말을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 말만이 분명할 뿐이다.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었다. 무한이며 영원이다. 그것은 지각이나 감각이나 그런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었다. 그냥 명백한 것이다. 전혀 예기치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던 이 일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먼저 나는 성경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해석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사물들이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풀과 나무와 집과 산과 구름이 너무나도 경이롭게 보였다. 세상이 너무나도 생명으로 넘치고 아름답게 보였다. 한강철교를 지나가는 기차도 열심히 달려가는 생명체로 보였다. 택시를 타고 학교를 가는데 기사가 내 눈물을 볼까봐 많이도 얼굴을 감추었다. 길가에 서 있는 전신주까지도 생명으로 활활 넘쳤다.
그 상태가 약 두어 달 갔다. 온몸이 무언가로 꽉 찬 것 같고, 무언가로 감전(感電)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집에 있는 책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있음직한 책들을 찾아 다 뒤져보았다. 어디에서고 그와 똑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십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1994년 12월 어느느 날 제자인 김 비타 수녀가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삶의 끝에 서서」였다. 무슨 책인가 하고 궁금해서 먼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서두 부분에 천 년 전 어떤 수도사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그 기록에 내가 본 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이야기가 있었다.
실로 십이 년 만에 나는 그때의 그 감전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그때서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비타 수녀, 김 마리루시 수녀, 최 레지나 수녀에게 더듬더듬 빛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지나 수녀는 자상하게 나를 지도해 주었다. 나는 지금 다시 두 번째로 살아나는 느낌이다. 잠재했던 십이 년 동안의 세월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완전한 사랑 안에서 맛보는 완전한 기쁨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살아온 일생에 대해 반성하고 총정리했다. 쉰 살의 나이였다. 지금 나는 또 한 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십이 년 전과는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나는 그게 무슨 일인지 알고 받아들인다. 궁극의 문제, 그것을 찾는 일이 완전히 중단되고 이제는 다 포기하고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내 의식과 몸 속에 남아 있는 잔재가 다 떠나가려면 어느 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지난 십이 년 동안은 막연했다. 지금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내 그림과 내 조각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를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하나도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할 뿐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뒷날 마음이 좀 가라앉았을 때 기록을 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왠지 할 수 없었다. 두렵기도 하고 또 해서는 안 될 일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언젠가 아주 잊히면 어쩌나 싶어 빛‧사랑‧기쁨‧감사 이렇게 몇 자만이라도 일기장에 적어놓고 싶었다. 그것마저 했는지 안 했는지 찾을 수 없다. 1983년에 쓴 수필 ‘두 번째 강(江)’에 r 무렵의 심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988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면서 화집을 만들었는데, 서두에 적은 한 마디가 있다.
나는 이룩한 일이 없고 평화를 위해 기여한 것이 없다.
1989년 「나의 삶, 나의 행복」속에는 “내가 살아온 전체와 나를 보았다. 그 뒤 두어 달가량 세상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라고만 간단히 적었다. 빛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고 또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수필 속에는 여기저기 빛‧사랑‧기쁨‧감사라는 단어가 눈에 띌 것이다.
내 안에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다. 어떤 변화의 징후 같기도 하다. 마음이 굉장히 평온하다. 흐름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의지를 쉬고 싶은 것이다. 그 절대의 고요는 절대의 생명이다. 그 절대의 빛은 절대의 사랑이다. 오직 절대의 기쁨뿐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분이다.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전부터 본래부터 그렇게…이다.
어둠은 세상의 것이다. 자유는 ‘완전한 항복’에서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죽음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육신적인 것의 죽음, 세상적인 것의 죽음, 그것이 완전한 항복이다. 자유의 나라, 사랑의 나라, 기쁨의 나라, 우리가 다 같이 희구해 마지않는 곳. 그곳이 하늘나라다. 거룩한 곳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