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기 전에 몇 해쯤인가. 내가 그때까지 해온 여러 형태들이 순서대로 쭉 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오십을 넘기면서 다시 지난날의 전체를 한눈으로 보았는데 참으로 마음이 착잡했다. 그 무진한 번뇌와 무모한 격돌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저 광란의 기간을 십 년만이라도 단축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두 번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첫 번째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강물이었다. 여름날 친구들과 물장구치고 놀던 강(江). 소를 몰고 냇가 둑에 앉아 그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아이들은 전날처럼 그렇게 놀고 있건만 나는 홀로 저 풍경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 강물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나는 이쪽 기슭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날들이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 한 세상이 끝나고 다른 한 세상 속에 내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짜릿한 그리움 같은 것인데 꿈 같기도 하고, 지금도 그때 심정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두 번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이 강물은 참으로 무섭다. 어린 날의 강물은 지금도 다시 뛰어들어 놀고 싶은 강이지만 지금 흘러가는 저 강물은 사람을 삼켜 없애는 죽음의 강 같다. 저 죽음의 흙탕물은 피로 물들어 산 같은 노도(怒濤)를 만들고 격랑하며 모든 생의 씨앗들을 질타하여 파괴하며 끝도 없는 곳으로 휘몰아 간다. 그 속에서 나는 젊음을 몽땅 불태웠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작품을 했다기보다 모색의 연속이었고 좌충우돌 설 자리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러 지식은 서로 분리되어 혼란과 마찰을 유발했고 그래서 그 여러 지식들로 하여 오히려 번민했던 것 같다. 지식이 날것으로 나의 주변에서 서성일 때 나는 불안하고 그것은 내가 터득할 때에만 다정한 혈육임을 알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나는 세상만사 모든 것이 나의 혈육이 되어 일체감 속에서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분리 현상이 극복되기를 희망한다. 내 고독은 분리에서 온 것 같다. 나는 자유를 찾아 너무 많은 시간을 방황했다. 그 흘러간 시간들은 지금도 황혼의 저 지평 속에 아물아물 살아 있고 나는 지금 오후의 느슨한 졸음 같은 것을 경험하는데, 그 폭풍의 시간들을 회상하기도 하며 어떤 감미로움에 취하기도 한다.
어쨌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섭기는 하지만 섭섭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나씩 알게 되고 하나씩 친근해진다. 나는 역사와 대결하는 자세로 임한 것 같은데 그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역사는 내 속에 있고 나는 역사 속에 있었다. 나는 사회 속에서 나의 특수성을 주장하려 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사회는 내 속에 있고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이도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거기서 흡족함을 얻지 못했다. 선택이 아니라 관심이고, 관심이라 할진대 결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부의 작은 문제들을 소중히 아끼고 보존하고 길렀어야 했다. 나는 탈출하여 자유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면 탈출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자유는 오히려 적극적인 접근에서 온다. 친절하고 적극적인 접근, 그것이 참 생의 길이고 예술은 그 성취를 위한 통로같이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술 자체가 목표는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나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나의 내부 공간에서 이지러진 풍경들을 보게 되었다. 제자리에 바로 있는 것이란 없는 것 같았다. 방어에 열중하여 근본을 소홀히 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내 방 안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종합 작업이 아닌가 싶었다. 분별이 아닌 수용과 조화, 시비가 아닌 아낌과 포용, 미세한 것들에 대한 정성 어린 배려. 한 가닥의 가녀린 풀잎에서 큰 음성을 듣고 싶은 것이다.
순결 문제가 오늘처럼 절실하게 가슴으로 와 닿는 때를 나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 순결이야말로 생명의 가장 기본 요소인 듯싶다. 순결은 언어가 탄생하기 이전의 것이다. 우리의 사념(思念)이 순결로 이어질 때 가장 생명적인 것 같다. 순결은 원초의 숨결로 호흡하고 바람은 자고 허허적적하다. 나는 나의 육체 속에 또 내 내면의 공간 속에서 무수한 비순결의 형체들이 서식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모두 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내가 키워놓은 것들이다. 그 속에서 나의 순결은 가련하고 가난하다. 바른 인식과 바른 사고력은 순결의 속성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또 가치는 손결에 힘입어 그 도달이 가능하다. 순결 없이 자유는 있을 성싶지 않다.
심성의 세계는 방대하여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의 심성은 무한을 호흡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한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분리는 무한 세계의 한 파편이다. 나는 한계라는 것을 참 많이도 경험했다. 어디서나 한계를 보고 번민했다.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나는 한계가 없어지길 바랐고 또 그것을 부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한계는 더 많은 한계를 만들고 나는 거기서 구속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후퇴하고자 한다. 저 심성의 바닥으로, 시각(視覺)의 세계를 생성하는 밑층으로 후퇴하고자 한다. 후퇴야말로 자유에 이르는 여울목이 아닌가 싶다. 생명의 밀실이 있는 것일까.
나는 물론 오늘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멀리에서 찾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찾아 들어간다는 말이 더 옳을 것 같다. 외부와 내부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외부는 곧 내부이고 내부는 바로 외부다. 나는 그동안 외부에서 찾고자 바빴다. 그러는 가운데 외부는 이미 내부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나의 모자람에 대해 지나치게 질타했던 것을 후회한다. 그것은 무지(無知)였다.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마냥 그대로 있는 것 같은 저 난(蘭) 잎을 바라보며 나는 부끄럽다. 저 풍요, 저 자제, 쫓김새 없는 성실, 그것은 참으로 구체적인 삶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과 기쁨, 감사의 기분을 경험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보답인가, 아니면 천래적인 것인가. 애매성이 없는 분명한 인식, 그 분명한 인식이 높이 승화되고 맺힘이 없어 사방으로 소통되는 형태들에서 나는 사랑‧기쁨‧감사의 파장을 느낀다. 예술은 침묵의 파장이요 영원히 살아 있는 언어다. 예술은 자유롭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 도피는 자유가 아니다. 도피는 또 다른 범주에 빠지게 마련이다. 진정한 자유는 수용이요 저항이며, 그리하여 사랑으로 승화되는 초월에 이르러서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예술은 진리에 접근할수록 예술로부터 떠나려 하는 것 같다. 예술은 언제나 떠나려는 충동을 안고 있는 것 같다. 예술은 떠나려는 충동이 가까스로 형태에 의해 지탱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과의 가장 구체적인 평형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각은 촉각적이다. 조각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친근하고 은밀한 촉각에서 한없는 날개를 편다. 그 촉각의 날개가 춤추는 허공은 무한하다. 조각은 가장 미세하고 사랑스러운 촉각에 발을 담그고 광대한 공간을 호흡하는데 그 내용은 인생과 자연, 삶과 죽음, 또 그 너머까지다. 조각은 관념이 아니라 사실(事實)이다. 생명은 엄연한 사실이고 관념이 아니다. 예술이 관념으로 흐를 때 리얼리티를 상실한다.
나는 그림을 세상을 위해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순전히 나를 위해 그린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안과 바깥은 상호 연계성을 갖는 것이기에 굳이 한쪽으로 단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내 형태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 단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다. 나는 단정된 사물에서는 애정을 느낄 수 없다.
나는 상당히 긴 시간을 보상 문제로 하여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내가 갚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많은 문제와 또 내가 갚음을 받고 싶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하여 누적된 체중이었다고 생각된ㄷ. 사실 나는 받을 것이 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받고자 했기에 고통을 당한 것 같다. 받을 것은 매순간 다 받고 있다. 받음의 문제는 분명히 무형적이다. 그것은 기쁨의 숨결이고 풍요의 숨결이다.
완당(阮堂)의 ‘유희삼매(遊戱三昧)’, 왕희지(王羲之)의 ‘신호기의(神呼技矣)’라는 글씨를 보면서 나는 멀리 백설 덮인 큰 산을 바라보듯 숙연하고 또 숙연했다.
번뇌의 강을 건너 관조의 강으로, 그리고 빛과 사랑과 자유의 물결 넘치는 강이 있지 않은가.
오늘도 구름은 무궁시(無窮時)를 흘러가고 봄의 창가에서 라일락 나무는 아직도 꿈꾸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