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의 나이에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많이 생겼다. 그중 유별난 것 하나는, 작은 문제들은 분명하게 잘 보이고 큰 문제일수록 더욱 몰라진다는 것이다. 눈은 또 원시가 되다 보니 먼 데는 이상 없이 잘 보이는데 가까운 곳을 못 보게 되었다. 신변의 사소한 것들은 뻔한 것이니 접어두고 먼 데 큰 문제에 관심을 가지라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난감한 것은 내가 여태껏 추구해 온 그림이라든지 조각이라든지 하는 것, 곧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 보면 젊었을 때는 그것을 뻔한 것으로 생각하고 곧 해결될 줄로 기대하고 겁 없이 덤벼들지 않았나 싶고 그래서 착잡한 심정이 되어 반성도 한다. 거기에다 더한 것은 삶이란 무엇인가이다.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죽음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와 현실이 되었다. 거기에다 더한 것은 이 생과 사와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자에 대한 것이고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너무도 까마득하여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짐작되는데 그 알 수 없음의 세계는 신비라든가 초자연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고 나는 그 앞에서 너무나도 작은 존재란 것이 점점 더 명료하게 실감난다.
어느 하루 문득 생각이 났는데 그것은 너무도 넓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한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 같고 또 도대체 시간이라는 게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인데 시작도 끝도 가량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도 같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식물이고 간에 나타났다 모두 없어지는데 그런 활동이 끊일 사이 없이 진행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성현들은 모두 비유로 말했다. 그 뜻을 해독할 수 없으니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늘나라라 했는데 그 하늘나라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 도(道)라는 문자를 썼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 뜻은 이 세상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었다. 말이란 우리 일상의 생활권에서 약속된 기호일 뿐인데 그 기호란 것이 워낙 한정되어 정말로 큰 뜻을 설명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불타도 내 말에 매이지 말고 내가 뜻하는 바 저쪽을 보라 했다. 말을 넘어서서 있는 세계, 세상 논리에 닿지 않는 세계, 그곳이 실상의 세계일 것 같은데 보여야지 말이지, 이렇게 답답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림은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이게 만들자니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매체로 삼게 되는데 안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에 대한 연관 훈련에 매우 편리한 방편인 것이다.
나는 전부터 그림은 그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방편이라 생각해 왔다. 그림의 목표는 좋은 그림에 있는데 가장 좋은 그림이란 아름다움의 끝자리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거기에는 도달할 수 없ㅅ는 것이고 그럴진대 어차피 과정이 아닌가. 상식으로 보아도 과정이 목표일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림이란 것은 어떤 좋은 곳을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방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끝없이 좋은 것을 찾아서 그 안 보이는 좋은 무엇을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이른바 그림이라는 것인데 말로 하자면 ‘가치의 구현’인 것이다. 가치에 이르는 것, 가치를 얻는 것, 그래서 가치를 형태로 구현하는 것, 이 모두가 구현이 안 된 상태에서는 그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편에서 본다면 이런 논리도 성립될 수는 있다.
만일 어떤 화가가 높은 그 가치의 경지에 있다 할 때 그림을 아직 안 그리고 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그림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말로는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방편은 끝이 없는 것으로 조건 지어 있는 것이어서 실제에 있어서는 애매한 이야기로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달통하여 큰 도인의 자리에까지 이른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예술의 조건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하나 마나 한 소리일 수도 있다.
나는 예술과 종교 문제를 놓고 많은 시간을 갈등했다. 예술은 예술일 뿐이고 종교는 종교일 뿐이다. 나의 갈등은 두 분야가 합쳐지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종교 속으로 예술이 합쳐지기를 바란다. 과거에는 동서 간에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는 예술가가 종교를 수용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방편까지의 절충은 어디까지나 절충일 뿐이지 해결은 아닌 것이다.
종교와 예술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평행선이어서 분리하는 것 또한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종교와 예술은 무한세계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합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분리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원래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자고로 위대한 예술은 둘이 만나는 자리 근처에까지 이른 것 같다. 지극히 적은 천재들이 그 빛나는 위치를 경험했다. 하나 둘씩 만나기 시작해 언젠가는 모든 것과 만날 수 있다. 횡적인 여러 가지가 많이 합쳐질수록 세로의 길, 깊이의 길을 가는데 가로를 꿰뚫고 세로를 꿰뚫어 마침내 하나의 꼭짓점에 이를 때 그것이 인간의 이상이 아닐까. 그 삼각형의 꼭짓점에 다다를 때 자연과 초자연, 유한과 무한이 함께하는 신비의 세계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가설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가설이 있다 해서 나쁠 것도 없다. 인생이란 무진장의 착오의 연속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