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는 것이라면 끝을 가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완전한 아름다움과 시작 사이에 중간지점 또한 가상할 수 있었다. 그 중간지점을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예술가인데 타고나기 전에는 그 선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왜 못 넘느냐 하면 밑에서 잡아끄는 힘을 견디지 못해 그런 것인데 그 힘이란 것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의 내부, 육신에 속하는 문제였다. 자기와 싸워 이긴 사람만이 중간지점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인데 그리되면 이제는 위로부터의 파장권에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 참으로 바쁘고도 좋은 경지를 살게 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모 신부께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어느 장사가 이 중간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그 신부 힘 하나 안 들이고 “하느님이 불러주셔야죠.” 해서 한바탕 웃었는데 그 답변이 나올 것을 기대했던 차였다. 타고난 사람이 전력을 다했을 때 행여 위로부터 불러주는 손길을 만날 때. 은총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와 같은 현상이 아닐는지.
조각이란 것을 하면서 나는 줄곧 사람만 만들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 분명하다. 20세기라는 시대는 인체 만드는 조각가가 아주 적은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의 인체조각가들은 인체를 조형미의 탐구로만 썼다. 나는 어쩐 일인지 그게 안 되었다. 그것을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사람을 만들려 한 것이다. 인간, 정신이 깃든, 영혼이 깃든 인간상을 만들려 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불상조각이 좋았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를 산 인간상. 그것이 불상조각의 이상이었다. 더할 수 없는 완전함을 생활한 사람을 형상화한 형태, 그것이 불상조각인 것이다.
막연했던 것이 요즘에야 분명해졌다.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을 만들자.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들자. 그러나 나는 지금도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생각하는 것, 또 정신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체이되 그 안 보이는 것을 함께하는 인체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보이는 아름다움만이 아닌 오히려 안 보이는 것이 가까스로 인체로 형상된 인간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착오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직은 어쩔 수 없다. 예술로서 잘못된 것이라면 그것을 깨달을 때 고치면 그만 아닌가.
예로부터 가치의 궁극을 진리라 했고 진리란 진‧선‧미가 합일된 것으로 보았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진과 선에서 분리될 수 없으리라 믿었다. 세상에 분리된 것이란 인간의 에고만이 있을 뿐이 아닐까. 진리(眞理)에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에고는 그만큼 약화될 것이다. 에고를 깨뜨리려 할 게 아니라 방향을 진리 쪽으로 하고 한 치라도 가기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그만큼 에고는 부스러진다. 만일 내 안에서 에고가 사라진다면 나는 전체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수한 경계가 있다. 하나의 경계를 넘으면 또 하나의 경계에 당면하고 수도 없는 경계를 넘는다 해도 수도 없는 경계와 또 만난다. 경계에서 해방되는 길은 위로 올라가 그 무수한 경계를 내려다보는 방법밖에 없을 성싶다.
내 그림이 자유롭게 되려면 무수한 경계를 모두 수용하고 이해하여 높은 데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성싶다. 높은 데란 어디인가. 현실로부터의 떠남,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하여 실재하는 현실을 보는 곳. 나는 그림에는 높은 그림, 낮은 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계산하기 어려우리만치 층이 있다. 내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늘 자성하고 가늠을 해보는데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말로 그 부끄러움을 다 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한 치라도 올라가려면 지금으로서는 그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 끝남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나그네라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란 것이 아닐는지. 내가 가는 것이라기보다 안 가려야 안 갈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어찌 생각해 보면 운명 지워진 것 같기도 하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은 일을 그만할까 아니면 몇 시간 더 할까 하는 결정은 내가 할 수 있지만 내 안에서 무엇이 그런 결단을 하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선 모호해지는 것이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성괴멸의 대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은 과학자의 길을 가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의 길을 간다. 어찌 그것을 내 맘대로 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조건 지어져 태어난 것이지 어찌 그렇게 내 맘대로 태어날 수 있는가.
내 맘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예술가다. 그런 위인들일수록 그의 생애를 분석해 보면 참으로 오묘한 그러저러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었을까.
세상 만물은 하나에서 파생되었다. 그 하나는 없음에서 나왔다. 있음인 것 같기도 하다 있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그 경계를 넘어가서…. 성인들의 말씀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친다. 그림을 그리다 음악을 듣다 ‘아, 하느님!’ 하고 속삭일 때가 있다.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서 왕희지의 그런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아, 이것이 바로 신이 아닌가!’라고 쓰인 글씨.
나는 근래 몇 년을 대학원 학생들한테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요즘 관심 갖고 있는 문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틀렸어도 할 수 없다. 듣는 사람이 고치면 될 테니. 안 틀린 이야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말한다.
주제는 늘 같다. 나는 청년 시절에 생각한 것을 지금도 계속 생각한다. 낭에 따라 달라지는 점이 생기는데 그것이 재미있다. 달라지는 것이 자연인 것 같다. 그 꽃나무에서는 그 꽃이 피어나고 잎이 돋아난다. 그러나 작년의 나무와 올해의 나무는 다르다. 그들의 삶이 풍요해지고 번성한다. 저 꽃나무의 숙명적 삶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의 숙명적 삶에 대해 생각한다. 이 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