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선생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나에게 영향을 준 하나의 작품이 있다면 김종영(金鐘瑛) 선생의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53년 당시 「문화세계(文化世界)」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어느 달엔가 첫 페이지에 그 작품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아직 미술대학에도 입학하기 전이고 또 조각에 대해 경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아는 것도 없고 더더구나 그 작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진 한 장이 내 가슴 깊이 못 박혀 그 뒤 몇 십 년간 지워지지 않는 큰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조각을 전공하여 무슨 인연인지 그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것을 숙명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종영 선생을 통해 자연을 보는 법과 형태를 구축하는 법, 역사를 익히는 법 등을 건너다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생각하고 수련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둥근 달이 솟아오르듯 문득 백제불상이 내 공간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나에게 두 번째 큰 사건이었다. 그 불상의 얼굴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지만 말할 수 없는 큰 고마움으로 받아들였다. 지금도 분명치는 않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떤 정신공간과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학점 없는 논문을 내게 되어 있었다. 그때 쓴 것이 <형태가 내포하는 문제>였다. 형태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형태란 것은 인간적인 여러 문제와 관계될 것이고, 특히 정신적인 것과의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성경이 예술론 같고, 좌우간 그런 생각이었다. 훗날 조각을 해나가는 중에 불상이 나에게 다가온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서울역에 내려 버스로 혜화동 쪽을 향해 가는 중에 필동 근처 어느 담벼락에 붙어 있는 불교사상 대강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장소와 일시를 확인하고 당일 가 보니 지금의 조계사였다. 그 뒷날부터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비원 앞 태고사에서 불교 강의를 들었는데 저녁을 굶는 날도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논문이 되고 십여 년 후 불상조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었는데, 다만 사는 게 고달프고 모든 것은 알 수 없고 막막하고 답답했는데 원인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명 정치수를 위한 모뉴망>과 불상, 그 두 번의 만남은 내 일생을 결정짓다시피 한 큰 사건이었는데 순수미와 정신미, 현실과 이상, 순간과 영원처럼 상반하는 것 같은 것과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싶다. 김종영과 장욱진, 브랑쿠지와 자코메티, 세잔과 루오, 그리스와 이집트, 동양과 서양, 삶과 죽음…. 끝도 없이 펼쳐지는 상반성 속에서 나는 많이도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든 생각이 나는데 그럴 일이 아니다, 양쪽을 끌어안고 다 소화하고 극복할 일이 아닐까.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가슴이 다 후련했다. 그 뒤로 나는 이쪽과 저쪽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차츰 그런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한 군데 모아놓고 그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