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걷잡을 수 없이 또 흘러갔다. 지금은 언제 끝날지도 모를 나날을 살고 있다. 기댈 데도 없다. 스승들이 있었지만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혼자 있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어릴 때 종이배를 만들어 개울에 띄우던 생각이 난다. 종이배는 물살 따라 뒤뚱거리며 흘러갔다. 그 모양이 마치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의지보다 상황에 따라 내가 움직인다. 일하는 시간만큼은 즐겁다. 일하는 시간은 잡생각이 끼어들지 않아 좋다.
손자가 장난감 놀이를 한다. 그걸 보면서 내 처지를 생각했다. 효용성이 없는 일에 열중하는 것. 옛날 어른들은 유희삼매라 했다. 어른이 아기들 장난감 놀이하듯 열중하는 형국과 같은 일이다. 나이 들어 예술을 하는 일이 어린이 놀이하듯 즐거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목적성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큰 예술가들이 모두 어린이와 같이 돼야 한다고 했나 보다. 어린이가 어른이 됐다가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이치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는 노년(老年)을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그 예술가의 노년을 살고 있다. 탐진치(貪瞋痴)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탐함도 남아 있고 성냄도 남아 있고 어리석음도 남아 있다. 그러나 때때로 조용할 때가 있다. 멀쩡하니 앉아 깜박 나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일할 때는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 현실을 잊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을 가장 확실하게 살 수 있는 나의 시간이다.
여러 가치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일시에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모든 것이 하나 될 때 모든 것은 무너졌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늙음이라는 말 속에는 한 생의 경험세계를 한눈으로 본다는 뜻이 있다. 무엇인들 안 보았겠는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갈 것인가. 작품을 만드는 데 무슨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데 무슨 의미를 두겠는가.
요새는 일에 빠지는 시간이 그저 좋다. 철모르고 접어든 길인데 이렇게 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일일 것이니 가르쳐 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림이란 것은 끝 날까지 찾아야 할 일이다. 문인들은 이런 말을 했다.
“왜 글을 쓰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글을 쓴다.”
먹고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비약된 말이 아닐까 싶다. 답이 안 나오는 것이 예술의 길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서 답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고서 27년이 지나갔다. 화살같이 지나갔다.
좋은 작품이 만들어져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꿈이다.
“능금나무 열매는 쉬면서 익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인 듯싶다. 예술가의 노년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얻어야 한다. 과일은 나무에서 떨어지기 전까지가 더 아름답다. 완전한 익음의 상태로 아직 가지에 붙어 있을 때.
나는 바다를 보았다. 나는 다만 바다의 한 부분만을 보았다. 그러나 부분이 전체와 같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작아진 것을 보고 있다. 작은 것 앞에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큰 것이 된다. 가장 큰 것을 일러 무한이라 한다. 무한이란 영원이란 말과도 같다. 강물이 한번 바다에 이르면 되돌아갈 수 없듯 사람의 발걸음도 지나온 데를 되짚어갈 수 없는 것. 예술의 길은 한정이 없고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는 사정없이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