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이신 김종영 선생은 생전에 진담을 농담같이 잘하셨다. 한번은 “쓸데없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좌중이 한바탕 웃었는데 그 뒤 곰곰 생ㄲ해 보니 의미심장한 말씀이었다. 선생이 작고하시고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이야기를 글로 적어놓은 것이 있었다.
“동거고금을 다 보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가 쓸데없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찾아 일생이 바쁜 것인데 어찌 그것을 역행하자는 말인가. 어쨌든 그 말씀에서 나는 지금도 큰 위안을 얻는다.
얼마 전 어느 수녀원 수녀님들이 만나자는 전갈이 있었다. 거기를 가야 옳은지 안 가야 옳은지를 한참 생각하다 그분들은 나보다 훨씬 쓸데없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야 옳겠다고 결정했다. 나보다 쓸데없는 일을 더 하는 분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했다. 또 며칠 전에는 시인 구상 선생의 책을 얻어 펼쳐 들었더니 그 서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시낭송회에서 한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했다. 내용인즉 이런 것이었다. 남해 고도에 가서 민박을 했는데 집주인이 수달 잡는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나게 하는지 “그래 그동안 몇 마리나 잡으셨소?”라고 물었다. 집주인은 “여태껏 한 마리도 잡지 못했소.”라고 대답했다.
나는 쓴웃음을 삼키면서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구나 하고 안도했다. 나는 30여 년 동안 조각을 한답시고 꽤나 열심히 덤벼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여태껏 단 한 개의 진짜 조각이란 것을 못하고 있다. 그 시인은 민박집 주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또 내 이야기이도 했다.
어떤 신부님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마침 옆에 아무도 없고 해서 나는 “실은 내가 하느님에 대해 몇 십 년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 몰라라 하고 앉아 있는데 그 신부님 답변이 “난들 어떻게 알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놀라서 그 뒤 이삼 년간 아무한테도 그 말을 못하다 하루는 철학하시는 박갑성 선생을 만나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아직 조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무척이나 재미나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분수껏만 일하고 더 욕심 부려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크게 속 썩을 것도 없다. 어지러운 것을 능력껏 가라앉히고 얽힌 것을 한 가닥씩 풀어 나가는 재미, 혼돈에서 질서로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 그래서 한 치라도 더 질서 쪽으로 접근하려는 의지,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숙명이 아닐까 싶다.
한번은 학교사무실에서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놀고 있어도 즐거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피카소는 이런 말을 했다. “붓을 들기는 좋은데 붓을 놓기가 어렵다.” 내일 일하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오.” 이는 카잘스의 말인데 행복을 찾는 문제에 대한 답이었다.
“지워도 지워도 다시 살아남는 비순수여! 사탄아, 물러가라!” 이것은 사십대 고뇌의 시절, 그때의 내 절규였다. 공자 같은 위대한 인물도 칠십이 되어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데 나 같은 사람은 자유의 뜻을 모르고 싸움판에서 살다 갈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면 섭섭하기 그지없다. 마음의 평정, 깨끗함의 성취, 고독으로부터의 해방, 이를 어찌 다 풀어내랴.
살다 보면 별별 일도 다 생기는데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내 살아온 것을 글로 쓰면 책이 열두 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것 같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런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길지도 않은 인생인데 웬 사연이 그리도 많은지. 그야말로 책으로 열두 권 감이다. 그런데 위대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다 겪었으리라 짐작된다. 세상만사 인생살이 어디서나 다 똑같을진대 건너뛰고 쉽게 산 사람들이란 있을 성싶지 않다.
한번은 참 기이한 일이 있었다. 한순간에 내가 나를 본 것이다. 내가 살아온 전체와 내 현재 모습이 명료하게 거기 있었다. 분명한 것은 백지에 점 하나도 찍지 못한, 그렇게 완전히 무(無)였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부끄럽지도 않고 공포는 더욱 아니고 고독이라는 것도 없었다. 오직 기쁨만이 있었다. 순간의 환상이겠지만 나의 전부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뒤 나는 주판을 털고 다시 둘 때처럼 내 과거를 완전히 털고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 후로 약 두어 달 가량은 세상이 어찌나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마치 죽었다 다시 살아나 새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환경대학원 교수 김형국 씨의 ‘아들의 아버지’라는 글을 읽고 크게 감동한 일이 있다. 세상눈으로 볼 때 집안의 부끄럼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소상히 적은 것인데 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김 교수가 연전에 내가 화집을 만들 때 날 보고 자전적 연보를 좀 자상하게 써보라고 했다. 그러기에 나는 죄가 많아 언젠가 참회록을 써야 할 사람인데 지금은 실력이 없다고 농담으로 대답한 적이 있다. 다 털면 좀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랴. 거기에다 저 큰 세상 빚은 언제 다 갚으랴. 그림 그린다는 것이 세상 빚 갚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젊어서 한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시간과 돈과 사랑을 달라. 대폿집에서 부린 객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심각할 것 하나 없는 문제였다. 그것만 있으면 내가 무언가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시간이란 것은 늘 거기 있었고, 여적 굶어 죽지 않고 살아왔으며, 사랑이란 것은 내가 찾는 것이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투정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고 가슴을 세 번 친다. 공염불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건성으로 사는 것이 그럭저럭 몸에 배어 있다.
성경책을 보면 극적 장면이 많다. 그중에서도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돌로 이 여인을 쳐라.” 하는 대목이 인상 깊다. 정말 신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 장면은 예수가 십ㅈ가에 높이 매달려 운명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군중 틈 어딘가에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는데 나는 그 여인이 참으로 딱한 심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연도 많은 그 여인. 최근에 연희동 성당 내부를 개수하면서 날 보고 십자가상을 만들라 하기에 왼쪽 팔 밑에는 성모와 요한을, 오른쪽 팔 밑에는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들어 넣었다. 저녁에 다시 작업실에 내려가 그 광경을 보니 눈물이 났다. 너무나도 딱한 저 여인, 그 여인이 자꾸만 우리 어머니 같고 또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줄곧 사람만 만들어 왔다. 사람 중에서도 여인상, 여인상 중에서도 소녀상만 만들었다. 나는 그림에서도 주로 여인의 얼굴을 그려왔다. 가끔 정물도 그리고 풍경도 그리지만 인공의 흔적이 없는 데만 찾아서 그렸다. 그러자니 자연 꽃이 좋고 바다가 좋고 하늘이 좋고 구름들이 좋았다. 나는 이제 굳이 의미를 물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을 오래 만들다 보니 좋은 얼굴을 만들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좋은 얼굴이라는 것이 정해진 게 없어 자꾸만 만들게 된다. 내가 본 중에 가장 좋은 얼굴은 석굴암 본존상 뒷벽에 서 있는 보살들이다. 물론 얼굴이 좋았지만 손도 좋고 발도 좋고 옷주름 등등 모두가 좋았다. 나는 요즘도 날마다 생각하는 게 좋은 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훌륭한 사람을 만들고 싶어질는지도 모르지만….
사람 만드는 조각가 중에 자코메티라는 훌륭한 예술가가 있다. 그는 가장 작은 조각을 만들 수 있었던 조각가요, 가느다랗게 인체의 시늉만 한 사람을 만드는 조각가다. 작년에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순회하는 그의 대(大)회고전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가 새로운 해석을 했는데 그의 작품을 일컬어 ‘20세기의 성상(聖像)’이라 했다. 그 기사를 보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20세기는 성상이 없는 시대였다. 그런데 자코메티는 혼자서 성상을 만들고 있었다. 일찍이 사르트르가 그를 평하여 ‘절대의 탐구자’라 했다. 그러고 보니 평론가와 사르트르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한 셈이다.
내가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나도 친구가 있다. 나는 외롭지 않다는 심경의 표출이었으리라. 세상 친구들은 모두 모던(modern)한 일을 하는데 나만 홀로 외딴곳에서 사람만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해 참 회의도 많이 했던 터라서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사람이란 무엇이며 좋음이란 또 무엇인가. 무엇인가, 무엇인가, 어떻게, 어떻게…. 나는 오늘도 계속 묻는다.
지금 라디오에서는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20번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자꾸만 반복되는 잔잔한 멜로디가 왠지 그렇게도 좋다. 나는 언젠가 어떤 평론가로부터 “왜 조각을 하시오?” 하는 느닷없는 물음을 받은 일이 있다. 당황한 나머지 “글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서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며칠 뒤 신문에 ‘시켜서 한다’는 부제를 달아 인터뷰 기사를 내놓은 것을 보았다.
그 뒤 여러 해가 지나 스승 한 분을 만났는데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 ‘시켜서 한다면서?’ 하셔서 내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이 새롭다. 누군가가 있어 나를 시켜서 조각이 된다면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것이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모차르트의 음악은 누가 시켜서 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저럴 수가 있을까,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시스티나 성당 안 미켈란젤로 천장벽화를 볼 때도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