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각가로서 일생을 여인상만 만들어 왔다. 그것도 소녀상뿐이었다. 왜 그랬는지 내가 나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하도록 입력이 된 것이 아닐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일까. 전생의 업이 있어 이생에 관계된다고도 한다. 무심코 만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인데 어떤 한 부분이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필시 무슨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어찌해서 일생을 그런 것만을 되풀이할 수 있었는가. 나는 전혀 지루한 줄을 몰랐다. 날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고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늘 소녀상이었다. 새로운 형상과 신선한 세계에 접근하려 한 것인데 귀착점은 번번이 소녀상이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만들었다. 새로운 형상과 신선한 세계를 이룩하려 날마다 열심히 한 것인데 어찌해서 여인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것도 소녀상에만 매달린 결과가 된 것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딴 일을 하는데 나만 동떨어져서 이렇게 살아왔다. 왜 그랬는지 정말 알 수 없다. 외롭고 소외된 생활이 힘들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깨끗한 것, 맑은 것, 청순한 것, 그리하여 성스러운 것. 그런 단어들이 상징하는 세계가 늘 그리웠다. 그것은 끝이 없었다. 나중에는 성모상이 되기도 하고 관세음보살상이 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굽이굽이 끝없이 먼 길 같고 또 되돌아보면 인생 팔십이 잠깐인 듯싶다.
예술의 길은 끝이 없고 인생은 빨리 늙는다. 나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눈 팔지 않고 한길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지름길이 있을 것 같아 헤매느라 오히려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이 있다. 말로는 쉽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년엔 길이 안 보여 막막했다. 다음에는 길이 사방에 널려 있어 선택을 어렵게 했다. 먹고사는 게 어려웠지만 참을 수 있었다.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거려니 생각했다.
어려운 것은 예술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알 수도 없고 풀어 나가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다 물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내 한 마음 쓰기에 달린 일이었다. 꿈만 구름처럼 부풀어 있었지 사방은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 밤길에 위로가 되는 것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친구들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은 가고 또 가고 했다. 흐르는 세월마저 없었더라면 더욱 막연했을 것 같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잊어버린다는 것이 참 좋은 약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고 새날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잠이 들었다. 매일의 삶이 그러했다. 그렇게 한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예술이란 바다와 같이 넓은 것이고 내게 주어진 나의 한계가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물음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어떤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하!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모든 것은 다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홀가분했던지….
그때 내 나이 쉰 살이었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매우 작은 어떤 부분일 뿐이다. 바다를 보았지만 한구석을 본 것이지 전체를 본 것은 아니다. 아무도 전체를 본 사람은 없다. 예술이란 한 전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런 전체다. 그것을 나는 지금 확실하게 알고 있다. 아무튼 예술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나의 한계가 보이는 만큼 분수에 넘는 일을 욕심낼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