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 책방이 있다기에 손자 따라 구경을 나섰다.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넓은 공간에 고급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진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어른들 보는 책이 한 칸 꽂혀 있었다. 우연히 그곳으로 눈길이 닿았는데 「예술과 영혼」이라는 책이 있었다.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서 인간 정신이나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옛날이야기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영혼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고 낙후된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될 것이다. 요즘 그림에는 영혼이라는 문제가 빠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책 제목을 보고 신기한 생각이 든 것이다.
급하게 한 쪽을 펼쳤다. 타고르의 글이 눈에 띄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고 정신을 게을리하는 것은 형태의 피상적인 면만을 보고 그리는 것에 불과하다. 형태의 진정한 인식을 획득하려면 우리들 영혼의 빛으로 만물을 비추어야 한다.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발하는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하나 이 말이 마치 먼 데서 오는 가느다란 메아리처럼 들린다. 이 시대의 그림은 형태와 색채뿐이다. 가령 아무개라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데,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한다면 굳이 아무개라는 특정한 인물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형태적인 면과 색채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 테니까.
세상은 다양하고 인간 활동이란 것도 간단치는 않다. 현대라는 이 시대를 일러 대체로 이렇게들 말한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지고 있다.’ 영적인 것이 빠져 있다는 말이다. 타고르가 말하는 영혼의 빛 말이다.
이 문제는 유럽의 예술사에서 오래전부터 이야기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가 조형예술에 큰 공을 이룩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요한 무엇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 중요한 무엇이란 유럽의 중세기가 갖고 있는 어떤 것을 일러 하는 말인데, 이른바 영혼성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예외라는 것이 더러 있다. 그것을 일러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경우가 그렇고 렘브란트의 경우가 그렇다. 렘브란트의 경우는 천부적인 면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이고 미켈란젤로는 탐색의 도달점이 영적 세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세에 와서는 반 고흐와 루오의 경우가 그렇다. 서로가 처지는 달랐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추는 빛을 감지하고 그 빛을 따라갔다는 점에서는 둘이 같다. 루오는 종교를 전제로 놓고 삶으로 순종한 사람이고, 반 고흐는 탐구의 과정이 또 탐구의 결과가 늘 안 보이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렸다.
천재 중에서도 더 천재가 있는 것인지 몰라도 유럽의 미술사에서 위에 말한 네 사람은 참으로 특별나고 탁월한 천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순수한 힘에 어떤 큰 힘이 보태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삶이 어찌 그토록 오묘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나는 이즈음 바다를 그리고 있다. 소녀상을 그리다 바다 풍경으로 넘어갔다. 엄청난 바다가 있고 그 바닷물은 수평선을 만든다. 수평선 위로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변화무쌍한 구름이 있다. 먼저 복잡한 사물이 없어서 그리기가 편하다. 단순해서 좋다. 바다도 하늘도 푸른색이 주조를 이룬다. 구름은 시간과 사정에 따라 파격적으로 변화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그려지는 한 줄기 수평선을 바라볼 때 무한함과 영원함에 대한 일깨움이 있다. 지금 내가 그것과 마주하는 것인지 그곳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원래 무한 안에 있었는데 내가 그곳으로부터 탈출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래는 영원 안에 있었는데 언젠가 거기로부터 추방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가 지금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그곳과 도로 하나 되고자 몸부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대개 화가들이 수평선, 지평선을 그릴 때, 또 하늘과 바다를 좋아할 때면 모두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근래에 와서 알았다. 무한과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풍경에서 소실점이 있는 곳에 성당을 그려 넣은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거기 성당이 없었는데 임의로 그려 놓았을 수 있고 성당이 있는 곳에 소실점을 맞추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지금 바다를 그리고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더 그릴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 화려한 세상에 이 무슨 답답한 짓인가! 나이도 이제 먹을 만큼 먹었다. 일생을 돌이켜 보는 반성을 자주 한다. 실패자가 아닌가. 일편단심 예술이라는 것을 한다고 곁가지 웬만큼 쳐내고 매진한다고 한 것인데, 내 속이 지금 이토록 허전한 것을 보면 필시 내 인생은 실패작이었다!
마음 다시 고쳐먹자고 날마다 결심을 새롭게 하지만 남은 생명은 하루도 보장이 없을 것일진대 문득문득 초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 잘못한 것이 너무도 많아 세상 보기에 부끄럽고 저 세상 보기에는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니 이 실패자로서의 인생에 탕감 받을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인데 어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세속에 속한 창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일일 것 같다. 내 그림으로 나도 이롭고 세상도 이로워야 할 터인데 아무런 기여를 못한다는 것을 알 때 그 허전함이란 이를 데 없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과 기쁨, 거기에다 한 점도 보탤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바다를 그리는 뜻은 그런 나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다. 내 안에 자유를, 내 안에 평화를, 내 안에 사랑을, 내 안에 기쁨을…. 그림이란 것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고립된 인간이 무한이라는 바다에 뛰어들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