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죄한 사람
흔들리는 풀잎을 통해 신(神)의 음성을 알아듣는다.(횔덜린)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림은 평면언어로, 조각은 입체언어로 이미 말한 것인데 그것을 다른 언어로 바꾸려 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백거이(白居易)나 릴케의 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제2의 창작행위’라는 말로 그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작품에 대해 도움말은 가능한 일이고, 또 실제로 어느 정도는 독해가 가능하다. 남의 그림을 보고 내가 그 상당 부분을 이해하고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 작품에 대해 내가 말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내가 나에 대해 더 객관적일 수 없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게 너무도 적다. 그래서 나를 설명하기보다 자기 성찰이 편한 일인 성싶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가. 그 안에서 내 작품이란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나의 형태가 내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나의 형태는 거짓말을 못한다. ‘나의 형태가 한 인간으로서의 나보다 더 나, 곧 최종태적인가?’ 하는 것은 모른다. 하지만 내 작품이 나보다 더 정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유동한다. 그런데 나의 형태는 끝나면 그 자리에서 고정된다. 형태도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을 뗀다. 사실은 그게 손을 떼는 것이니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으니 내 삶과 작품이 그런 점에서 다른 것 같다. 내 작품이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 애처롭다. 나는 지난날의 내 작품들을 보면서 늘 애처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 손 댈 수 없는, 그리하여 결정난 생명체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상대적으로 나는 정지할 수 없어 늘 불안하다.
생각은 찰나에 만 리를 왔다 갔다 한다. 감정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족(自足)하라 하고 행복이 최상이라 한다. 생각과 마음이 변하는데 어찌 지난 시간에 머물러 만족할 수 있겠는가.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란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는 일하는 어느 순간 자신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때가 자족하는 상태요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아무튼 살아 있다는 것은 무진장한 변화이자 끝없는 진행이다. 그런 연상선상에서 나의 형태는 개체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 모양이 온전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데에 예술가로서의 슬픔이 있다.
나의 형태는 어떤 한 순간에 한 개체로서 고정된 생명을 살아야 한다. 나는 지나간 나의 형태에 대해 더 이상 냉혹할 수 없다. 그것이 나와 내 작품과의 한계다. 나는 그 이상 어찌할 수 없다. 나의 형태는 그때부터 홀로 살아가야 한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불가분(不可分)이면서도 서로가 엄연한 독립체다. 그래도 나는 지나간 내 형태에 대해 늘 노파심을 갖는다. 끝난 것, 그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 말로는 그럴 수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내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 없어지는 날부터 내 작품은 홀로 될 것이다.
나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능력껏 누볐다. 특히 나의 모국 한국문화에 애정을 바쳤다. 격동의 시대에 나를 지켜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졌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 나는 큰 부끄러움을 경험했다.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육학년, 열네 살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고 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큰 실수를 했다. 우리 집 앞 정자나무 아래에 온 동네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있었다. 어른들이 모여 해방과 독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모여 해방과 독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한테 일본이 질 리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사랑채 마당에서 절구질을 하고 계셨다. 내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철난 소견을 말한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시던 어머니 모습이 선하다.
그때 생각이 가끔 떠오르는데 지금도 얼굴이 화끈하다. 뒷날 나를 찾는 과정에서 모국의 역사를 챙기게 되었다. 나라 없이 살던 어린 날, 그걸 모르고 살던 나의 어린 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우리 선배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연구했다. 말하자면 친일(親日) 문화에 대한 일이었다. 다시는 나와 같이 어리석은 후배들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특별히 내 나라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마침 그때는 서구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올 때였다.
육십 년대 중반쯤 나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만났고, 나의 길을 찾게 되었다. 나에게 반가사유상은 내 정신의 나침반과 같다 할까, 그 반짝임을 믿고 나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아리랑>을 부르고 윤용하(尹龍河)의 <보리밭>을 부르면서 흥분했을 때가 바로 그 시절이다. 나는 젊었고 봄날은 길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말 칠흑 같은 밤이었다. 내가 아름다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작년 가을 추사(秋史) 선생의 글 한 구절을 발견하고 크게 감격했다.
“세계 역사를 섭렵하고 소화한 연후에 자유로워지고, 그리하여 나는 지금 내 그림을 그린다. (入於外法 出於無法 我用我法:입어외법 출어무법 아용아법).” 세계미술 역사에서 그 누가 이처럼 명쾌하게 예술의 본질을 꿰뚫었던가. 나는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나 빨리 이루고 싶은 생각에 오판이 많았을 것이다. 큰 고기가 쉽게 잡힐 리 없고 행운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진리의 문은 열리지 않는 법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한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반가사유상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나를 매혹시킨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은 미국미술의 신사조(新思潮)인 미니멀리즘이다. 그 단순한 형태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나는 그만 그 속에 폭 빠졌다. 그전에 액션페인팅이란 게 있었는데 시원하기는 했어도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나는 열렬한 고민에 빠졌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거기에다 김종영(金鍾瑛)과 장욱진(張旭鎭)의 형태가 나를 또 사로잡았다. 사중(四重)의 덫 사이에서 나는 헤매야 했다. 두 인격을 통해 세계미술사를 재음미했다. 고대와 현대가 한마당이 된 것이다. 거기에다 당대 주류를 이루는 추상미술에 대한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처럼 나의 내부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할 만큼 치열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런 생활이 좋았다. 하는 일은 참담했지만 나의 청춘은 화려했다. 그 무렵의 작품이 서너 점 살아 있다. 십 년 넘게 그런 방랑의 시간을 살았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왜 그중 한 가닥 길을 선택하려고 서성이고 고민했는가. 다 끌어안고 소화하면 될 일이 아닌가.‘
나는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고 그런 방법으로 그 고민을 졸업하려 했다. 세계미술은 저만치 떨어져 큰 평원(平原)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산도 계곡도 있고 풀도 나무도 있었다. 하늘도 있고 바다도 있었다. 비로소 내가 혼자가 되어가는구나…. 주변이 차츰 조용해졌다. 그러는 동안 스승들은 다 저세상으로 갔다. 그분들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잊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내 눈으로 내 삶을 바라본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듯(実) 형태는 열려 나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고 열 달 후에 한 생명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참으로 신비다. 그 나무에서 그 과일이 열려 나오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려 나온다. 내가 어떤 과일을 만들까 하기보다 내가 먼저 어떤 나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