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것이 신(神)이 하는 일인가 싶게 참으로 오묘한 것이 형태다. 나의 형태는 과거의 어떤 형태들과 어딘가 닮아 있다. 사람이 없는 것을 창조해 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 형태는 자연의 모방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 예술이 가장 자연을 닮았다. 좋은 그림을 일러 자연스럽다고 한다. 억지로 된 일이 아니다.
자연이란 생명, 곧 살아 있음을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만드는가. 그렇지만 좋은 작품을 볼 때 우리는 확실히 생명감을 느낀다. 환희를 느낀다. 환희는 사랑이다. 공자의 말씀대로 하면 ‘사무사(思無邪)’다. 사악함이 없다 할 때 그것은 초월의 경계라 할 것이다. 1981년 봄쯤이었을까, 언제나처럼 스승 김종영 선생 댁을 찾았다. 그날은 특별히 선생이 직접 대문을 열어주셨다. 마당에서 돌을 다루고 계셨다. 손을 씻고 마루로 올라가시더니 그날따라 방으로 가자는 손 신호를 하셨다. 방에 좌정하니 언제나처럼 부인께서 커피를 두 잔 가져다 놓으셨다.
그때까지 시간이 좀 지났지만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께서 한 모금 드시고 찻잔을 놓으시자 조용히 한 말씀 하시기를 “신(神)과의 대화가 아닌가!” 하셨다. 나는 어찌나 놀랐는지 큰 세월이 갔는데도 그때 생각을 하면 정신이 멍하다. 그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 생각이 없다. 내가 응수가 없었으니 이야기는 다른 데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 뒤 선생은 큰 병환을 얻으셨다. 그 일성(一聲)이 존경하는 내 스승과의 마지막 대화가 된 것이다. 끝내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 물을 수 없었다. 짐작은 했지만 터득을 못했으니 염불만 했지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경(經)이란 ‘세로 줄’이란 뜻인데, 세로로 가는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는 것 같다. 종교와 예술과 철학, 그 모든 것은 궁극에 가서 한 군데로 모인다는 말이다.
“어린이와 같이 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성경)
“무릇 있는 것이 다 허망해질 때 부처님을 볼 수 있다.[凡所有相 皆是虛亡 見如來:범소유상 개시허망 견여래]”(불경)
“시(詩) 삼백 편을 골라놓고 보니 사악함이 하나도 없었다.”(시경)
추사 선생의 글씨에 “유천희해(遊天戱海 유희삼매(遊戲三昧)”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자유에의 희구일 것이다. 이른바 초월이다. 작은 초월, 큰 초월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가장 얻고 싶어 하는 행복이란 것도 거기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예술과 종교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말을 믿는다.
나는 종교를 예술에 접목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젠가 저절로 하나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종교는 종교이고 신앙은 신앙이고 예술은 예술이다, 그렇게 따로따로 생각했다. 종교적 진리도 알 수 없고 예술적 진리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의 예술과 삶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으면 모양이 볼 만하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루오가 그렇게 살았다.
종교가 예술을 지배해도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고, 예술이 독립해 혼자의 길을 찾는다는 것도 외로운 일일 것이다. 세계 역사를 돌아볼 때, 종교가 성할 때 예술도 성하고 종교가 쇠할 때 예술도 쇠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실한 삶, 높은 정신, 거기에 예술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예술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은 새삼 새겨볼 일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듯 그림에도 나이가 있다. 그림 나이가 사람 나이와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같이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이 들면서 나이에 따라 그림이 익어갈 수도 있지만, 반 고흐 같은 경우는 서른여섯에 이미 다 익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여러 세상 구경을 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그림이 익어가는 풍경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일이다. 명작이 아닐지라도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화가가 그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림과 함께 잘 늙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과일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서 비바람 속을 견디며 익어가는 모습. 그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인가.
우리 집 마당에는 모과나무가 한 그루 있다. 오래전 일이다. 어느 해 그 나무 전체가 꽃으로 뒤덮였다 할 만큼 마당이 환했다. 꽃이 지면서 열매가 열렸는데 너무 많이 열린 것이다. 그놈들이 커가면서 차츰 걱정이 생겼다. 그것들이 다 자라면 나무가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다. 모과 열매가 대추알만 하다 밤알만해질 텐데, 똑같이 생겼으니 솎아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마당에 나와 보니 모과 알이 수두룩하게 땅에 떨어졌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여러 날을 그랬다. 그러더니 어느 날에는 자두만한 모과가 있을 만큼만 남아 있었다.
아,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나는 그때 적은 앞의 글을 지금도 환히 기억한다. 꽃이 피는 것, 열매가 익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는 기쁨. 형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다. 나의 형태는 내가 낳는 것이다. 예술에 창조라는 명칭을 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생성과 표현과 탄생의 과정을 보면 자연을 많이 닮아 있다.
예술이란 결국 자연의 질서를 닮는 것이 아닐까.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완전함에 끝없이 도전하는 것, 단맛이 극점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지는 것. 예술에 완성이란 말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성싶다. 완성을 향해 끝없이 접근하는 것이다. 좋은 그림일수록 어떤 충만감이 있다. 그 충만감이 예술의 완성도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한평생을 바쳐 생각해 봤지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크고 방대해서 이성으로 해결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려고 할수록 모른다는 것이 더 확실해진다. 그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다. 하늘 끝을 누가 알겠는가. 생명의 실상을 누가 알겠는가. 아름다움을 누가 알겠는가. 우주는 우주대로, 작은 풀은 풀대로 무언가 꽉 차있다는 것을 느낀다.
‘흔들리는 풀잎을 통해 신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말한 횔덜린처럼 근원의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삶의 아침이 열린다. 온 세상의 어둠을 정화하는 찬란한 아침 해. “해야 솟아라.” 하고 박두진(朴斗鎭)은 노래한다. 그의 예술은 차라리 기도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명상한다. 아기 웃는 소리와 가까이 있고 싶다. 성스러운 아침이 열리고 그런 날 아침에 내 형태가 밝음으로 서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이 힘들수록 내 형태는 밝아질 것이다.
자비(慈悲)란 말이 생각난다. 비수(悲愁)란 말이 생각난다. 웃어도 그 웃음 곁에 쓸쓸함이 있는 것이다. 그게 어머니 마음이다. 사랑에는 비(悲)가 숨어 있다. 완당(阮堂)의 글씨에서는 쓸쓸함이 보인다. 나의 형태 안에 슬픔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것을 굳이 지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일할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마음의 소리를 믿었다. 이성(理性)보다 내면의 나침반을 믿었다. 나는 깊은 데로 가고 싶다. 밝은 데로 가고 싶다. 그곳은 참 기쁨의 세계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