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교육재단의 장학계획 발표와 첫 번째 장학금 수여식이 있던 2002년 4월 30일 오전 11시, 나는 개회시간을 몇 분 앞두고 식장인 서울 태평로에 있는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 들어섰다. 행사장에는 제1기 관정장학생 263명과 학부모, 전국 26개 장학 대상 대학의 일부 총장과 학생처장을 비롯한 장학 관계자들, 삼영화학그룹 임직원과 나의 친지들 그리고 취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단상으로 나아가는 도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단상 위에는 아래와 같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판 오른쪽 벽에는 세계 1등 인재 육성이라는 현수막이, 왼쪽에는 국내 최대 장학재단이라는 현수막이 나란히 아래로 내려져 있어 오늘 행사의 의미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단상에는 김종필, 이수성 전임 국무총리 두 분과 정운찬 서울대 총장, 김우식 연세대 총장, 한승주 고려대 총장 등 귀빈이 미리 자리하고 있었다.
11시 정각에 행사가 시작되었다. 재단 이사의 경과보고에 이어 재단 고문이 ‘관정의 발자취’라는 제목으로 재단 설립자인 나의 지난80년의 삶을 소개했다. 조금 긴 듯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관심 있게 듣는 것 같았다. 말미에 “어제의 구두쇠가 오늘의 천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내가 연단에 섰다. 행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긴장되기도 했지만 인사말을 시작했다.
“오늘 저는 80회 생년(生年)을 맞이하여 지난 세월동안 크고 작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리고 관정교육재단의 새로운 출범과 장학금 수여식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시기 위해 참석하신 내외 귀빈과 관정장학생 그리고 학부모 여러분들께도 감사와 축복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큰 재벌도 아니면서 거의 전 재산을 던져 아시아 최대의 장학재단을 만든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몸짓 하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이때의 인사말에는 내가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이하 관정교육재단이라 함)을 설립하게 된 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
|
| ▲ 제1회 장학금 수여식에서의 모습 / 왼쪽은 이수성 전 국무총리, 오른쪽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 |
|
“흔히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다고들 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생을 영겁(永劫)이 아니라 찰나(刹那)라 하고 있습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 짧은 현세를 잠시도 그르침 없이 살도록 하는 군자의 도(道)를 논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基督敎)에서는 내세를 위해 현세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찰나를 영원처럼, 영원을 찰나처럼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팔십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현세를 위해 사는 것이 곧 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고, 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 곧 현세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저 나름의 생활 철학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팔십 평생 오직 기업 경영에만 몰두하면서 이러한 저의 믿음과 생활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군 기업이 오늘의 삼영그룹입니다. 삼영은 비록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삼영은 저의 생활 터전이었으며 제 인생의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지나온 80년은 실로 짧지 않은 세월이어서인지 지금 이 순간 만감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를 주로 살아왔습니다.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빛과 그림자가 그만큼 뚜렷했습니다. 좌절의 아픔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도 적지 않았지만 성취의 기쁨으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때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저의 인생 역정 속에서 이 세상에 작은 발자국이라도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늘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은 재산을 사람을 키우는 일에 쓰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영그룹을 성장시킬 수 있게 만들어 준 우리 사회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이 재산은 저의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인류의 발전을 위한 세계 1등 인재 육성에 쓰일 것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장부가격으로 약 2천억 원 정도지만 시가로는 3천억 원 정도 됩니다(이후 추가 출연이 이어져 2017년 1월 말 기준, 재단 규모가 약 1조 원 정도로 늘어났음).
이 돈을 출연 받은 관정교육재단이 자동 조성하게 될 과실금(果實金)은 매년 150억 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중 100억 원은 전액 장학금으로 지급되고, 50억 원은 별도 재원으로 설립될 영재학교와 주요 대학 연구시설 및 사회복지사업 등에 쓰일 것입니다. 따라서 관정교육재단은 국내 최대의 장학재단이 되고 1인당 장학금 지급 액수도 국내 최고가 될 것입니다. 특히 본인의 별도 재산 250억 원을 출연하여 마산에 세울 전국 차원의 영재학교는 완전 장학금제로 운영되는 국내 최초의 학교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이 계획은 입지 문제와 허가 조건 문제 등으로 보류되었고, 이후 다른 사업으로 전환되었음). 또한 불우한 환경으로 소외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자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의 빛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관정장학생 여러분.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소박한 저의 꿈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렵니다.’”
이 말이 나오자 행사장은 일순 시간이 멈춘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만세” 소리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이어 행사장이 떠나갈 듯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나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외 귀빈과 장학생 그리고 학부모 여러분.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자유와 평등은 인류의 영원한 꿈과 이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꿈과 이상의 실현에 극히 작은 몫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갈 날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제 여생을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힌 뜻을 펴는데 모두 바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저의 뜻을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저희 재단을 잘 지켜봐 주시고 아낌없는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또한 이런 저의 뜻에 공감하시는 분은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박수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의례적인 박수 소리가 아니라 내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런 울림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는 ‘아,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는 빈손으로 치니까 소리가 제대로 나는 것 아닌가. 공수래(空手來)해서 만수유(滿手有)했고, 다시 공수거(空手去)하려니 비로소 박수가 제대로 나온 것이리라.
이어 전임 국무총리 두 분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세 대학 총장님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대부분 “세계 1등 인재가 되고 노벨상 수상자도 나와서 재단 설립자의 높은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하라’는 덕담들이었다.
드디어 한 사람, 한 사람씩 장학금을 주며 격려의 악수를 했다. 물론 나의 손은 빈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