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로 정확히 아흔셋이다. 정말 살 만큼 산 나이다. 옛날로 치면 주어진 수명의 문을 지나, 그것도 덤으로 얻는 세월의 길을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내딛고 있는 셈이다. 언뜻 주변을 돌아봐도 내 나이 또래가 흔치 않다. 90세가 훨씬 넘도록 기업을 경영하는 CEO는 더욱이나 그러하다. 동시대의 산업사회를 살아온 기업인이라면 대개가 창업 1세대이기 마련이다. 창업 1세대 중에 아직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해도 하나같이 건강문제로 요양 중인 분이 대부분이다.
꼭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생존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운신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거나, 와병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기업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다. 그것도 뒷전에 앉아 웬만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중요한 것만 보고 받는 식이 아니다. 매일매일 기업 전반을 체크하고 지시하고, 계산하고, 최종 결심하는 일을 내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상 자체가 여간 바쁘지 않다. 쉴 틈이 없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느냐, 그 비결이 뭐냐, 정색을 하고 묻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씩 웃고 말거나, 질문하는 사람의 진지함을 거스를 수 없을 때, 몇 가지 건강 비결을 공개하기도 한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나의 건강 습관이랄까, 내가 꾸준히 지켜온 생존 철학이랄까, 분주한 중에서도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나름대로의 노력이랄까, 아무튼 그 모든 것을 상세히 공개하려고 한다. 그것이 나에게 과분한 관심을 표명해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나의 도리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부터 피력하는 내용은 뒷부분의 각 단원에서도 군데군데 설명된 것이기도 해서 결국은 중복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굳이 거듭하는 것은 내가 걸어온 삶의 진면목이 바로 그런 사소한 습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탓이다.
남녀를 불문코 80세로 접어들면 우선 기억력이 감퇴되고 반사 신경 줄이 늘어져 제 구실을 못하므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나라고 해서 그런 의학적인 통계에서 벗어난 특수체질일 수 없다. 다만 있다면 인위적인 내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기억력을 도맡은 뇌신경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매일 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는 장병처럼 피나는 훈련을 감행한다. 다름 아닌 전화번호 암기가 그것이다. 자랑 같지만2 0년 전인 70대 후반만 해도 나는 무려 1백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그 때는 굳이 암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절실했으므로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입력되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를 돌려 제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 작업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긴장을 늦추고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원하는 제품은커녕, 엄청난 손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최일선에서 기계작동을 책임진 공장근로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제품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가, 기계에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가를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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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뇌신경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전화번호, 사자성어와 영어 문장이 적힌 수첩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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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공장에 설치된 유선 전화가 아니다. 개개인이 따로 소지하고 있는 핸드폰이다. 그래서 더 긴장하는 상태로 전화를 받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기계 가동을 책임진 공장 기술자치고 하루 한번 꼴로 내 확인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 최고 경영자인 회장이 세상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더 정확히 새벽 한 시에 직접 핸드폰벨을 울리게 하여, 흡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로 꼬치꼬치 상황을 점검하는 판이니, 그들 역시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어떻게 왕회장님이 개인 핸드폰 번호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지만, 이내 선배들을 통해 원래가 그처럼 유별난 회장이란 평판을 전해들은 다음부터 담당자들이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기계 가동을 잘못하여 불량품을 만든 적 없고, 기계 결함 때문에 제때 제품을 생산하지 못해 낭패를 당한 기억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비서를 여러 명 두고서도 나는 모든 전화를 내 손으로 직접 걸지 않으면 안 된다. 한밤중의 전화연결도 그러하고, 밥을 먹다가도, 운동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시간 허비 없이 그때그때 전달하는 방법이 그것 외에는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창 때에는 1백 개의 전화번호뿐 아니라, 근로자 1백 명의 이름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어쩌다 뒷모습만 보고 아무개 팀장이라고 불러줄라치면, 아이쿠 회장님이 내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구나, 감격하여 더 열심히 기계를 조이고, 기름칠하고 닦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창기만 해도 전화번호가 일곱 자릿수였던 것이 핸드폰이 보급되고부터 열한 자릿수로 늘어난 탓일까. 이제 내 기억 세포 속에 입력된 것은 1백 개가 아니라 50개쯤으로 급격하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나이에 따라 그만큼 기억세포가 훼손되지 않을 수 없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자연현상에서 가능한 벗어나 보기 위해 잠들기 전에 흡사 중학생 영어 단어 외우듯 전화번호를 열심히 암기하고 또 암기하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작고 시인 미당 서정주 씨는 기억력 감퇴를 막는 방법으로 세계 여러 나라 수도 이름과 유명 산맥 이름, 강 이름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풍류를 느끼게 하는 멋진 방안 같아 나도 흉내를 내고 싶었지만 웬걸 우선 발등의 불이 생산 현장 점검인지라 그 같은 풍류를 누릴 수가 없다. 다만 여유를 조금 부렸다면 전화번호 외에 내가 자주 쓰는 사자성어며 짧은 영어 문장을 외우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내가 필요한 전화번호와 사자성어와 영어 문장이 또박또박 적힌 오래된 수첩을 보물처럼 소지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수첩이 없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정도다. 그처럼 암기하는 훈련을 단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