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입고 연주하는 전자 오르간...

네 번째로 내 유일한 취미인 전자 오르간 연주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해방 전 고향에서 잠시 소학교 교사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등학교 교사는 예능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지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풍금 연주다. 내가 풍금에 처음 손을 댄 것도 그 때문인데, 그 즈음 아이들 교습용으로 잠시 배우고 익혔던 솜씨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마냥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 때의 풍금이 지금의 전자 오르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업 경영에 올인하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웬 전자 오르간이냐, 스스로 반문할 때가 많다. 그 답은 나 역시 잘 모르겠다고 결론짓고 만다. 내가 생각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 일상과 잘 어울리는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도 나는 그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권유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 틈에 전자 오르간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연주 시간을 특별히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시간은 대중이 없다. 모두가 잠든 야밤일 수도 있고, 초저녁일 수도 있다. 하루 일을 마감하고 막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빠트리지 않고 전자 오르간 건반뚜껑을 여는 것이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전자 오르간을 연주할 때의 내 복장이 늘 잠옷 차림이라는 사실이다.

▲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필자 / 악보를 보지 않고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은 필자에게 일종의 두뇌훈련이다

나는 악보를 준비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 내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는 곡을 그냥 쳐대는 것이다. 대신 나는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하는 연습을 처음부터 시도했으므로 곡이 틀리든, 늘어지든, 끊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주저 없이 열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곡목은 내가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아일랜드, 이태리 민요도 치고, 일본 가요도 치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며 <전선야곡>도 순서 없이 쉬지 않고 열 곡, 스무 곡을 연이어 연주한다.

하지만 되도록 음계가 틀리지 않도록 나는 수 없는 연습을 거듭했는데, 아마도 원하는 곡이 완전히 암기되어 스스럼없이 손끝으로 전달되기까지 1백 번 이상을 반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열 곡쯤 소화하고 나면 반시간이 족히 지나가고 만다. 그제야 손끝에서부터 피로가 파르르 전해진다. 하루 동안 덕지덕지 쌓인 피로감이다.

알다시피 회사를 경영하는데 정신적, 육체적 부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이 잘 풀리기보다 실타래처럼 마구 엉키는 경우가 더 많기 십상이므로 반갑지 않은 스트레스가 자동적으로 진득진득 눌어붙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음주가무로 그것을 푼다고 하는데, 나는 잠옷차림에 치는 전자 오르간으로 그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버리는 것이다.

아침 출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웬만큼 바쁘지 않다면 마지막 넥타이를 매자마자 또 한 차례 전자 오르간 앞에 앉는다. 그러나 어젯밤처럼 많은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딱 한 곡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경쾌한 행진곡이다. 다름 아닌 일본 해군 행진곡이다.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곡이지만, 그 역시 나는 손가락이 닳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으므로 악보 없이 이제는 나름대로의 기교까지 부려가며 거뜬히 연주를 끝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곡 치고 나면, 갑자기 오늘 하루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한 의욕이 분수처럼 치솟곤 한다. 저절로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갖고 있는 전자 오르간이 한 대, 두 대 늘어나다가 마침내 도합 일곱 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어야 할 곳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내 행동반경이 넓어진 것이다. 서울 집은 물론이고, 청주 공장, 마산 공장, 김해 공장, 여주 공장, 중국 공장, 별장 등등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아무 계획이나 계산 없는 내 개인 취향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지내놓고 보니, 악보 없이 곡을 치는 일이 너무나 적절한 두뇌운동이며, 신경운동이라고 가깝게 지내는 의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마도 90세가 넘어서까지 일상적인 평형감각과 순발력을 잃지 않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그때그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열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건반을 두들기는 그 연주 덕분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