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가르침-2 ...

얼마 전에 늘 쾌활해서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가 실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구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다 보니 가세가 기울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안방에 있는 쌀독에서 쌀 몇 되를 몰래 퍼서 그 친구 집 마루에 슬그머니 갖다 놓았다. 막 되돌아 나오는데 그 친구와 마주쳤다. 그 친구는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절대 비밀로 해라. 누가 알게 되면 나도 야단맞게 된다”고 다짐시키고 나와 버렸다. 사나흘 전의 일이다.

보릿고개를 예사로 여기던 당시에는 쌀 몇 되도 많은 양이었다. 그 친구는 자기 어머니께 야단맞을까 봐 그 쌀자루를 감춰둔 채 매일 한끼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쌀을 쌀독에 넣어 놓았다. 쌀독의 쌀이 이미 바닥났어야 하는데 매일 쌀이 조금씩 남아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친구 어머니가 내 친구를 다그쳤다.

아무리 해도 대답을 않으니 “어디서 훔쳐 온 것이 분명하구나. 우리가 아무리 못살아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거늘 이게 무슨 짓이냐”고 엄하게 나무라자 내 친구는 그만 실토하고 말았다. 친구 어머니는 이를 되돌려 주기 위해 우리 집에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두 분 앞에 무릎부터 꿇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었다. 친구 어머니는 혹시 자기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해가 풀렸다면서 친구의 손을 끌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 쌀자루는 기어코 놓고 가셨다.

그 날 밤 어머니께서는 나를 안방으로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쌀독에 쌀이 축이 나서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일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만일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 몰래 이런 짓을 한다면 큰일 날 일이다”라며 스스로 이실직고하길 기다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모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으로만 알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얼굴이 다시 화끈해졌다.

“마침 좋은 일을 하느라 그렇게 된 것으로 밝혀져서 다행이긴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좋은 일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자기 것을 갖고 할 때의 일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도둑이나 같은 것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해라.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학생부모에게 먼저 의논을 해야 한다.”

▲ 마산중학교 졸업식 사진

그 쌀자루는 다음날 어머니가 한두 되를 더 넣으시더니 직접 그 친구 집을 방문하셔서 정중하게 전달했다.

“받으시기 거북하시면 다음에 형편이 좋아질 때 갚기로 하시고 받으세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바탕의 소동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부모님이 몸소 가르쳐주신 이런 부지런함과 정직과 베풂이 그 이후부터 나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어머니는 시부모 봉양에서도 널리 칭송을 받는 며느리셨다. 몸소 시부모 수발을 살뜰하게 하시기도 했지만 특이한 점은 아들인 나로 하여금 할아버지와 침식을 함께하게 하면서 할아버지 수발을 들게 하신 점이다. 아침 일찍 할아버지 이부자리 개는 일, 밤새 사용하신 요강을 비우는 일, 방 청소하는 일은 내 나이 채 일곱 살이 못 됐을 때부터 하루도 걸러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임무였다.

집안일을 시킬 사람이 있는데도 굳이 내게 그 일을 맡기신 것은 교육적인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할아버지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효성에 대한 백 마디의 훈계나 가르침보다 효과적이라 여기셨던 것 같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덕분에 나 또한 손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재단 장학생들을 대할 때도 늘 친손자 손녀를 대하듯 하고 있다. 어릴 적 할아버지 방의 따스한 추억이 내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소학교 시절 학업에 크게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길 좋아했다. 내 공부를 돌봐 주시는 선생님이 한 분에서 두 분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학업에는 크게 열중하지는 않았다. 말을 물가에 끌어다 놓아도 말이 물을 안 먹으면 소용없다는 이치와 같았다. 선생님이 두 분이나 드나들어 부모님의 사례 부담은 더 늘어났지만 나는 절박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집안에는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물려주느니 경서 한 권을 더 읽혀라’는 가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부모님은 이 가훈대로 열심히 가르치려 했으나 개구쟁이 시절의 나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의령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갈 즈음에야 비로소 학업에 열의를 가지게 됐다. 마산 유학 시절, 마산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일제 지배를 체험하고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느끼면서부터 향학열을 불태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본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