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은 메이지(明治)대학으로 정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 자체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특히 나라 힘을 키우려면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경상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나의 일본 유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42년 메이지대학 경상학과 2년을 수료하자마자 학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있던 조선인 대학생들을 대거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 와중에 나는 학문의 길에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도 육군대장이 되겠다는 꿈을 꾸긴 했다. 그러므로 ‘기왕에 끌려갈 바에는 육군대장이 된다는 목표를 향해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가자. 그래야 쿠데타라도 일으켜 우리나라의 독립도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맨주먹 가지고는 독립이고 뭐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며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소・만(소련과 만주) 국경 지대 관동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의 국가 이익을 위해 총을 들어야 했던 수많은 조선인 중에서 나는 그래도 행운아였다. 국경 경비대의 군 생활은 엄한 규율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 배치됐다면 많은 사람을 살상했을지도 모른다.
영하 46도의 혹한에 부동자세로 야간 초병을 설 때는 지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트럭 짐칸 석탄 더미 위에 몸을 싣고 석탄 운반도 해봤다. 아침에 부대에서 출발할 때 군용 밥통인 ‘항고’에 밥을 담아 나갔는데 점심 때 먹으려고 꺼내 보면 밥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기야 더운밥도 입에 떠 넣는 사이에 얼어붙을 정도로 대단한 혹한이었으니 밥통의 밥이 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언 밥을 포크로 쿵쿵 찧어 한 조각씩 떼어 입에 넣는데, 포크가 부러지기 일쑤였다. 순간순간이 나에게는 극기(克己)의 시간이었다.
내가 소속한 부대는 소총 아닌 포(고사포)를 보유한 부대라 포의 이동에 말을 사용했다. 따라서 평상시 얼마나 말 관리를 중시했는지 사람 생명보다 말을 더 귀하게 여길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런 부대의 졸병으로 말을 다루면서 일반 보병 부대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갖가지 힘든 경험을 했다. 겨울에 말 운동시키기, 말발굽 관리 같은 것이 모두 내 임무였다.
그때 겪어 봐서 말의 생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게 되었다. 말은 일단 드러누우면 곧 죽게 된다. 따라서 잠도 서서 잔다. 또 주기적으로 운동을 안 시키면 뱃병이 난다. 뱃병이 난 말이 옆으로 드러누우면 수의사들은 말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고 비눗물을 들이붓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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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국의 관동군 / 태평양전쟁 당시 관동군은 국경선을 두고 소련, 몽골과 다툼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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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식사 전에 안장조차 없는 말 위에 올라타서 말 운동을 시켰다. 잘못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얼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라도 하면 말발굽에 채여 크게 다친다. 얼음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뾰족뾰족한 편자를 달아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말을 운동시켰다.
운동이 끝나면 말을 묶어 놓고 콩깍지와 건초를 섞은 사료와 물을 넣어 주고, 대포를 걸레로 말끔히 닦는다. 내무반에 들어가 소총까지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은 불과 2~3분,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입 속에 털어 넣기에 바빴다.
대포를 끌고 산을 오를 때면 말이 아주 애를 먹였다. 말이 심하게 저항을 하면 할 수 없이 무게가 60킬로그램쯤 나가는 포신을 어깨에 얹어 말의 힘을 덜어 주어야 했다. 포신이 내 어깨를 무자비하게 내리눌러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의 근성은 그때 생겨난 것인지 모르겠다.
이듬해(1944년) 어느 날 부대 전속 명령이 떨어졌다. 연합군에 빼앗긴 오키나와를 탈환해야 한다고 했다. 시급히 오키나와로 이동해야 했다. 부산까지 가서 오키나와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속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8월 9일 소련군이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소 . 만 국경이 터졌기 때문이다. 다시 부대원 전원이 기차에 올라 북으로 향하는데, 기차가 용산에 도착했을 때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했다.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농 가문의 외아들인 나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시대의 격변에 대처해야 하는 가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떤 길로 나가야 하나.’
나는 냉철한 상황 판단 끝에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때 학업을 중단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당시 수준으로 보면 그 정도 공부한 것도 최상급에 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자가 될 생각은 애당초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업 중단에 큰 미련이 없었다.
시골 출신이면서도 경제적인 걱정 없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나의 성장기는 여기서 막을 내렸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곧 터진 6 . 25전쟁……. 세상은 줄곧 격랑 속에 있었고, 나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세상 한가운데에 나를 세우기 위한 고민과 모색으로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북쪽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식의 토지개혁이 벌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49년 지주의 농지를 가져가고 대신 지가증권(지금의 국채)을 내주는 식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지가증권은 6.25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질가격이 폭락했다.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지주들은 액면가의 20~30퍼센트 정도에 증권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증권으로 돈을 번 것은 곡물 투기상이나 고리대금업자같이 이재에 밝은 도시 사람들뿐이었다. 시골 부자치고 지가증권으로 성공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아무도 없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